법철학 입문의 모든 것
현대의 법철학자 : 풀러
풀러(Lon L. Fuller, 1902~1978년)는 하버드 로스쿨 법철학 교수로서 20세기 중반 미국을 지배하던 법실증주의와 법현실주의 사조를 비판하며 '절차적 자연법론'을 제안했습니다. 여기서 '절차적'이라는 뜻은 정의로운 법이 갖춰야 할 실질적인 내용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던 전통적인 자연법론과 달리, 정의로운 법이 갖춰야 될 최소한의 형식적 요건을 자연법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기준으로 실정법의 정당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자가 법에 대해 외재적 도덕성(external morality of law)을 강요하는 자연법론이라면, 후자는 법에 대해 내재적 도덕성(internal morality of law)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자연법론인 셈입니다. 풀러가 제안한 법의 내재적 도덕성은 다음 8가지인데, 그중 7가지는 입법과정에서 지켜져야 할 것들에 해당합니다.
① 법은 특수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제정되어선 안 되고, 일반적이어야 한다.
② 법은 공포되어 수범자에게 알려져 있어야 한다.
③ 소급입법은 최소화되어야 한다.
④ 법은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
⑤ 법은 상호모순이 없어야 한다.
⑥ 법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⑦ 법은 최대한 안정적이어야 하고, 자주 바뀌면 안 된다.
⑧ 법은 정해진 대로 집행되어야 한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generality
② promulgation
③ non-retroactivity
④ clarity
⑤ non-contradiction
⑥ possibility of compliance
⑦ constancy over time
⑧ congruence between offical action and declared rule
풀러는 이 8가지 원칙을 합법성의 원칙(pronciples of legality)라고 부릅니다. 정당한 법이라면 최소한 이 8가지 조건들 중 어느 하나라도 '고의로 심각하게 위반'하려고 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풀러는 '극히 사악한 지배'는 이 '합법성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통틀어 고찰해 봤을 때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합법성의 원칙은 정의로운 법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기에 그것만으로는 정의로운 법을 보장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합법성의 원칙이 지켜지는 법체계라면 '그렇게 나쁜 상태는 아닐 것'이라는 통찰인 것입니다.
풀러는 이 내재적 도덕성 혹은 합법성의 원칙을 완전히 결여한 법체계로 독일의 나치즘 체제를 뽑았습니다. 나치 정권은 권력을 잡기 위해 소급입법을 자행했고, 유대인 집단학살의 경우에는 유대인들에게 제대로 공포되지도 않은 법률에 근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 체제가 아닌 대표적인 국가들의 법체계를 떠올려 보면, 실제로 풀러가 말한 8가지 합법성의 원칙이 민주주의 국가에 비해 제대로 지켜지는 일이 현저히 적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풀러의 '절차적 자연법론'은 사실상 '법치주의'에 대한 새삼스러운 강조로 읽을 수 있기도 합니다. 자의적이어서 예측불가능한 통치가 이뤄지는 인치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공화주의적 의미에서의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전능한 권력을 가진 군주가 오직 선량하다는 이유만으로 제국 안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소수민족이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군주의 변덕으로 언제든지 몰살당할 수 있는 상태라면 그것은 당장 내 행동에 제약을 받는 상태가 아니라 하더라도 '자유롭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풀러의 절차적 자연법론은 법이 단지 권력자의 통치 수단으로써 '법에 의한 지배'가 이뤄지는 상태가 아닌, 법이 법이기 위한 초실정법적 규준을 두어 그에 부합하는 정당한 법이 제정되고 그에 의한 '법의 지배'가 이뤄지는 상태가 단지 공화주의적 의미의 '예속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는데 중요할 뿐만 아니라 극히 사악한 통치를 피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 실질적으로 도덕적인 중요성까지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적어도 인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극히 사악하고 야만적인 통치가 제대로 된 법치주의 체제 하에서 자행된 적은 없다는 경험적 사례를 근거로 들며 말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을 전제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풀러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19세기 미국은 적어도 풀러가 말한 8가지 합법성의 원칙은 대체로 준수되며 굴러가던 문명국가였습니다. 하지만 풀러가 1856년 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 사건에서 대법원이 '흑인은 미국 시민권이 없다'고 판결한 것까지 과연 '정당한 절차에 따랐으니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닌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판결이 부당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도덕과 정의의 실질적인 내용들, 가령 '인간의 존엄성', '평등의 원칙'과 같은 것을 끌어다 올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논리들이 풀러가 그의 주저인 ≪법의 도덕성(The Morality of Law)≫에서 말한 것처럼 반드시 "천상에서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것 따위라는 논변으로만 정당화된다면 풀러가 행한 방식처럼 절차적 자연법론을 탐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최신 법철학 논의들은 그보다는 차라리 '인권'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현대인이 납득할 수 있는 합리주의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더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풀러도 그 자신이 인지했다시피 그의 '합법성의 원칙'은 정의로운 법의 필요조건이기에, 그 원칙이 지켜진다고 하여 정의로운 법이 입법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합법성의 원칙이 극히 이례적인 경우일지라도 현실의 법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실질적 도덕성도 담보하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합법성의 원칙을 확장하거나 대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인권'의 실질적인 내용을 확정하거나 정당화하는 작업은 정치철학계나 법철학계에서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따라서 저는 "풀러의 이론은 한계가 있고, 다른 이론 A가 맞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풀러의 이론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법철학적 배경으로서 불충분해 보인다고는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정리하자면 개인적인 견해라는 전제 하에서 풀러가 언급한 합법성의 원칙은 정의로운 법의 필요조건이라는 점은 거의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되지만, 실정법을 심사하는 준칙으로서는 그보다 더 풍부한 조건이 더 필요해 보인다고 결론짓겠습니다.
현대의 법철학자 : 피니스
피니스(John Finnis, 1940년~)는 법실증주의가 팽배하던 20세기 영국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을 연구한 법철학자입니다. 그의 주저인 ≪자연법과 자연권(Natural Law and Natural Rights)≫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그의 독창적인 해석과 함께 아퀴나스의 자연법론이 왜 현대에도 설득력이 있는지에 관한 설명이 체계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자연법론자들이 사실로부터 규범을 도출해 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좋은 것(εὐδαιμονία, eudaimonia)'으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해 냈고, 이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 또한 인간과 자연의 본성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에게 자명하게 좋은 선'으로부터 반성적 성찰을 통해 규범을 도출해 냈다고 말합니다. 즉 아퀴나스는 사실로부터 규범을 도출해 낸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피니스 또한 자신의 자연법론을 전개합니다. 우선 피니스는 모든 사람이 추구할만하고 그들에게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선의 기본형식(basic forms of human good)'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생명, 지식, 놀이, 심미적 경험, 우정, 실천적 합당성, 종교 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모든 인류에게 좋고 선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 중에서 실천적 합당성은 우리가 인간선의 기본형식을 추구함에 있어서의 방법론적인 한계를 설정합니다. 이를 '실천적 합당성의 기본조건(basic requirements of practical reasonableness)'이라고 하는데 이는 도덕적으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여기에는 선의 추구, 삶의 일관된 계획, 가치와 사람에 대한 자의적인 선호의 배제, 초월과 헌신, 이성의 한도 내에서의 효율, 모든 행위에 있어서 기본가치의 존중, 공동선의 조건, 양심추구가 포함됩니다.
피니스는 이러한 인간선의 기본형식과 실천적 합당성의 기본조건을 통해 대부분의 부정의를 걸러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선과 정당성의 요건들로부터 각종 구체적인 인권들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럼에도 피니스는 부당한 법일지라도 즉시 무효가 되지는 않는다고 봤습니다. 자연법은 그 자신을 어긴 실정법의 효력을 박탈한다기보다, 수범자의 양심까지 구속함으로써 외면적 강제에 머무르는 실정법에 실질적인 정당성과 효력을 부여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피니스가 토마스주의자임에도 고전적인 자연법론자들과 비교적 뚜렷하게 구별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한편 모든 자연법이 그러하듯이 '정의로운 법'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고 정당화하는 것은 상당히 난해한 작업입니다. 단순히 사람마다 생각과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해 전 인류에게 그 자체로 좋은 것을 확정하기란 불가능하다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이건 문제를 지나치게 얄팍하게 파악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명', '심미적 체험', '우정'과 같은 가치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실제로 좋은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극히 예외적인 괴짜들이 그 가치들을 평가절하하는 음울한 삶을 살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의 괴상한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대가로 전 인류에게 '생명', '심미적 체험', '우정'과 같은 가치들을 보편적으로 보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이상한 일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문제를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고민해 보면, 만일 '인간선의 기본형식'이 정말로 확정적이라면 단지 '법이 이것을 증진할 경우에는 수범자의 양심을 구속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소극적인 의미에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요? 혹시 피니스가 주장한 대로 인간선의 기본형식 중 하나인 '종교' 같은 가치를 국가가 비종교인에게 강요해서 그에게 '인간선'을 실현하고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할 필요가 생기지는 않을까요?
'생명', '놀이', '심미적 체험' 같은 것들이 대체로 누구에게나 좋은 가치로 간주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가치들이 국가와 법의 정당성과 결부되어야 하는지 혹은 그것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나 법의 의무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클래식 음악을 듣고 철학 고전을 탐독하는 게 취미라면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심지어 그건 어떤 면에서는 바람직하고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국가가 락 밴드 음악을 금지하거나, 소년만화를 금지해서는 안 됩니다.
피니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선의 기본형식'이 수범자의 양심을 구속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면, 국가가 정책적으로 그런 선을 증진하고 지향하지 말아야 할 합당한 이유는 찾기 어렵습니다. 가령 '우정'이 자신에게는 진정으로 좋은 가치라고 여겨지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어떤 법이 '우정'이라는 가치를 적절하게 증진한다는 이유로 '양심에 대한 구속'까지 느껴야 한다고 강요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국가가 개인의 긴밀한 내적 삶에 깊숙이 간여하는 것이 정당함을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피니스의 이론은 겉면만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자칫하면 전체주의 사회로 미끄러질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있는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지만 피니스는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입법한 것이라면 내용이 무엇이든 다 효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법실증주의자들이 더욱 전체주의에 대해 열려있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니스의 이론이 전체주의에 대해 덜 취약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실증주의가 나치의 법체계를 정당화했다는 책임을 묻는 자료는 많지만, 현대 자연법론이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자료는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굳이 지면을 할애해서 정치철학적인 이야기도 덧붙여 보았습니다. 제가 아퀴나스나 피니스에 대해 깊은 지식은 없기 때문에 이들을 오해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의로 그들을 곡해한 적은 결코 없지만 그럼에도 사견을 전제하고 서술된 부분들은 그런 점을 감안하시고 여과해서 읽으시는 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