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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협한 이데올로기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은 다면체다

'다원주의자 선언'

by 삼중전공생

빨간 색안경을 쓴 사람


빨간 색안경을 쓴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붉게 보입니다. 단지 더 붉은 것과 덜 붉은 것만 존재할 뿐입니다. 제가 대학교 새내기 때였던 당시, 제게도 빨간 색안경을 쓴 사람들이 주위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자유지상주의니, 사회주의니, 페미니스트니 등등으로 정체화하면서 세상을 오직 '더 붉은 것과 덜 붉은 것'으로만 구분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이상적이고 단일한 '옳음의 기준'으로부터 얼마나 더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따라 세상을 파악한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정합적인 세계관 안으로 현실을 편집해 짜맞춰 인식하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다면체다


'세상은 다면체', 제가 만든 말이면서 동시에 가장 좋아하는 격구입니다. 세상은 한쪽 방향 내지는 관점에서만 바라보아서는 그 실체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정육면체는 어떤 각도에서 보면 육각형이고,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마름모이면서 또 정사각형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정육면체를 두고 이것이 육각형이니, 마름모니, 정사각형이니를 놓고 싸우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모두가 파편화된 진리를 분유하고 있는 관점이기에, 입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균형 감각과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유지상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또 다른 그 어떤 이데올로기라도 세상의 모든 면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관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육면체라는 세상의 실체는 하나이지만, 그것을 말로 기워내 정합적인 세계관을 만드는 차원에서는 결국 정육면체를 바라보는 무수한 각도 중 한 곳에서만 그를 묘사해 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섣불리 스스로를 어떤 이데올로그라고 정체화하고, 색안경을 써서는 안 되는 까닭입니다.


노란봉투법에 반대하면서도 노동자들의 권익 증진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성의 군 복무가 성차별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여성들의 출산으로 인한 경력 단절과 고용 시장에서의 차별을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모순 관계가 아닙니다. 사회주의자의 색안경에서는 노란봉투법 반대는 곧 자본가에 부역하는 기득권 일파로 분류됩니다. 페미니스트의 색안경에서는 '군무새'는 곧바로 '한남'으로 분류됩니다. 세상을 단색으로 이루어진 단면체로 인식하는데서 오는 패착입니다.


당연하게도 이런 패착은 진영을 가리지 않습니다. 가령 중국공산당이 국가 안보에 위협적인 집단이라고 인식하면서도 최근 중국인 혐오가 도가 지나친 심각한 사회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한국의 원전 산업 생태계를 복원한 것은 성과라고 평가하면서도 한밤중의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에 군부대를 투입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테러라고 규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하지 않는 한, 양자는 색안경을 쓴 채로 다면체인 세상을 단면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원주의, 한국 사회의 시대적 요청


다원주의는 세상에 대한 갖가지 다양한 관점들이 모두 저마다 비교불가능하게 소중한 가치를 고유하게 옹호하고 있다는 견해입니다. 가령 낙태 문제와 관련해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종교계는 생명의 존엄성을 저마다 중시하면서 양자는 상대측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두 가치 모두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의 모순 반의어가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원주의는 이 같은 경우에 그 두 가치들이 서로 비교불가능하게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원주의가 상대주의는 아닙니다. 상대주의는 허무주의로 이르는 미끄러운 비탈길의 입구입니다. 다원주의는 모든 가치가 '절대적'인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와는 다릅니다. 가령 다원주의는 탁월한 정치의 예술을 요청합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의 존엄성을 동시적으로 충족하면서 페미니스트들과 종교계 모두가 충분히 만족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납득할 수 있는' 실낱 같은 가능성 안으로 사회적 합의를 골인시키게 만드는 탁월한 정무적 균형 감각과 사회적 책임감을 정치인과 법관들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갈등의 잠재 요소가 많은 사회에서 정치인과 법관들이 수많은 가치들 중 한 가지의 손만 지속적으로 들어준다면, 이는 사회 분열과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뒤집어서, 사회 분열과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에서는 정치인들과 법관들이 다원주의적 견지에서 수많은 가치 충돌의 국면에서조차 절묘한 균형을 발견하고 이 지점으로 사회적 합의가 이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다원주의적 마인드가 특히 정치인과 법관들에게 필요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넘어서


민주당 지지자는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개혁신당 지지자도 '나만 옳다'고 생각하며, 국민의힘 지지자도 '나만 옳다'고 생각하면 이들이 모여 도출할 수 있는 합의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도 세상에는 틀린 말만 하는 사람은 없고, 아무리 반듯한 사람이라도 항상 맞는 말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의 오류가능성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상대방이 옳을 가능성을 늘 열어둬야 합니다. 옳고 그름은 근거가 주장을 얼마나 잘 뒷받침하는지 그리고 논리적 모순이 있지는 않은지의 여부를 놓고 가려야 할 뿐, 내가 선 자리에서 본 다면체의 일면이 세상의 실체적 진리의 전부이기 때문에 내지는 내가 속한 진영이 항상 정답만 추구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구분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다원주의자 선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회적 갈등의 절충점을 찾아야 할 정치인들이 오히려 갈등을 확대재생산하는 포퓰리즘에 빠지고, 사법부마저 균형 감각과 독립성을 잃어가는 현실 속에서 건강한 민주시민이라면 '다원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대남들이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하기 전에, 페미니스트들도 이대남을 힐난하기 전에 자신들의 태도로 인해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사회적 자유를 영위하는 근본 토대인 민주주의 자체가 훼손되고 있지는 않은지, 그래서 가라앉는 배 위에서 무의미한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고 '반페미'니 '페미'니 하기 이전에 민주주의자, 즉 다원주의자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상대방을 정당한 집권 경쟁 상대가 아닌 세상에서 지워버려야 할 적으로 보면 붕괴됩니다. 상대방을 그렇게 보게 되는 순간은 나만이 유일한 진리와 선을 옹호하는 세력이고, 상대방은 이를 방해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편협한 생각은 '세상은 다면체'라는 사실을 잊게 되면 들게 됩니다. 세상은 단면체가 아닙니다. 그런 차원에서 '옳고 그름'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기준을 나 혹은 내가 속한 진영만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원주의자 선언'을 합시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딛고 올라서기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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