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황
정부는 19일 채권 장 막판에 2차 추경안을 발표했습니다. 세입 경정 10조 3천억원이 반영된 총 30조 5천억원 규모의 추경안이었습니다. 세입 경정은 세수가 예상보다 더 걷히거나 덜 걷힐 때 예산안을 조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번에는 세입 감액 경정으로, 세입 감액 경정에 따른 추경이 10조 3천억원이라는 말은 예상보다 10조 3천억원의 세금이 덜 걷혔는데 그렇다고 정부 지출을 줄일 수는 없는 상황이니 불가피하게 국채 발행으로 부족한 세수를 메운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재명 정부가 자신의 의지대로 새롭게 쓸 돈은 20조 2천억원으로, 이중에서도 적자국채 발행규모는 19조 8천억원 수준입니다.
이는 당초 민주당 인사들이 언론에 언급한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일단 국채 시장은 추경 불확실성을 그런대로 소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만 서울채권시장의 외국인들의 행보는 눈에 띄는 모습입니다. 외국인들은 그저께 3년물 및 10년물 국채선물을 모두 순매도했는데, 추경이 발표된 이후에도 순매도 규모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늘리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만일 외국인들이 추경으로 인해 한국 경기가 바닥을 치고 회복세를 타거나 불확실성이 해소될 것이라고 봤다면, '추경으로 인해 일시적인 금리 상승이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 채권 시장도 안정화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채권 매도세를 줄이거나 심지어 매수세로 전환할 가능성도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근래 내내 국채선물 매도세를 이어갔다는 것은 이들이 한국 채권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매우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 그럴까요? 이스라엘-이란 분쟁의 여파일까요? 그렇다기엔 한국 국채는 근래의 중동발 위기 국면에서 안전자산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입니다. 결국 국내 금융시장의 내부에서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저는 핵심적인 원인을 추경안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소위 민생지원금으로 알려진 민생회복 소비쿠폰의 국비와 지방비를 합한 총규모는 13조 2천억원 수준으로 이번 추경안의 핵심을 차지합니다. 만약 이 민생지원금이 촉발할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기를 확실하게 부양할 것이라고 예상된다면 외국인은 국채시장에서 자금을 회수하지 않았을 겁니다.
일반적으로 물가상승세가 가팔라지면,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국채 가격은 하락합니다. 국채 표면금리가 3%라고 가정할 때, 물가상승률이 2%에서 3%로 오르면 국채 보유로 얻은 이자를 상승한 물가가 다 까먹어 실질금리가 0%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채 보유의 매력이 줄어드니 너도나도 시장에 국채를 내던지게 되고, 그러면 국채 공급 물량이 받아줄 수요에 비해 많아져 자연히 국채 가격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즉 외국인들은 추경안 발표를 보고 민생지원금의 경기 부양 효과보다 인플레이션 확대로 인한 악영향이 더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통화정책에도 영향을 줍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통화정책을 일환으로 쓰기도 하지만, 이럴 경우 금융자산에 묶여 있던 자본들이 낮은 금리를 떠나 시장에 풀리면서 통화가치가 떨어져 인플레이션이 유발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는 경기 부양을 위한 금리 인하라는 통화정책 카드를 함부로 쓸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다 한국 경제의 고질적인 병폐인 서울 부동산 가격 문제도 한몫합니다. 금리 인하로 인해 신용 대출과 주택담보대출 등의 금리도 낮아지면 부동산에 투기 수요가 몰리면서 특히 서울 아파트 가격이 상승할 가능성이 큽니다. 게다가 이미 서울 아파트 가격은 2월 초 상승 전환한 이후 20주째 오름세를 타고 있고, 그 폭은 더 가팔라지고 있습니다.
이미 가계부채가 산더미처럼 쌓인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 상승은 주택 구입을 위해 더 큰 빚을 지도록 만들고 가계부채도 그에 따라 스노볼처럼 굴러가게 만듭니다. 가뜩이나 경기도 좋지 않은데 가계가 채무 상황 능력이라도 상실하는 쇼크를 받는다면 이들에게 돈을 빌려준 은행도, 이들에게 돈을 빌려야 할 기업도 줄줄이 도산하게 될 것이고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파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지지율을 관리해야 하는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은행도 눈여겨보고 통화정책을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하는 요소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인 막대한 가계부채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서울 부동산 가격이 상승세라는 배경까지 합쳐져 도무지 한국은행이 금리 인하를 쉽게 결정할 수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국채선물을 순매도하는 외국인들의 평가인 것입니다.
왜 이런 논리가 성립하는지 상세하게 살펴봅시다.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시장금리가 낮아져 새로 발행되는 국채는 표면금리를 높게 줄 까닭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기준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았을 적에 발행된 높은 표면금리를 가진 국채에 대한 선호가 증가하고 이 국채들에 대한 가격이 상승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향후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가 예상된다면 아직 표면금리가 높은 시기인 지금 국채를 매수하거나 적어도 팔지 않는 것이 통상적인 채권 매매 포지션입니다. 그러니 그런데도 외국인들이 국채선물을 순매도 했다는 뜻은 당분간 한국은행이 위와 같은 사정들 때문에 기준금리를 인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데 베팅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결국 요약하자면 외국인들은 민생지원금을 핵심으로 한 추경안이 발표된 것을 전후로 국채를 순매도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민생지원금이 인플레이션을 촉발하고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를 주저시키는 것에 비해 경기 부양 효과가 적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재명 정부와 그 지지자들이 민생지원금의 효과에 대해 갖는 확신과 달리 한국 국채 금리는 이재명의 대통령 취임 이후 거의 0.1%p 올랐습니다. (채권 금리와 가격은 반대로 움직입니다.) 여기에는 다른 요인들도 없지 않지만 서울채권시장에서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본 이슈가 추경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이 이재명의 '민생지원금'에 대한 시장의 냉정한 평가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번 추경으로 추가 발행된 국채 규모는 거의 20조에 육박합니다. 코로나 19 당시 급박한 상황에서 이뤄진 추경 규모와 유사한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민생지원금으로 채워졌습니다. 덕분에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49.0%로 0.6% 상승하게 되었고, 국가채무 규모도 1천 300조 6천억원 수준이 될 전망입니다. 이로 인해 10대부터 40대까지의 청년들과 어쩌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은 더 많은 빚을 떠안게 됐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 더 높은 금리로 국채를 발행해야 할지도 모르게 됐습니다.
더욱 우려되는 건 이러한 추경이 반복될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재명이 대선 후보 당시 했던 주장대로 민생지원금 정책이 부작용은 거의 없으면서 경기활성화 효과만 갖는다면, 앞으로 '습관적'으로 추경을 해서 민생지원금 명목으로 돈을 뿌리지 않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국채 금리가 하염없이 오르면 거기에 연동된 신용 대출 금리와 주택담보대출 금리까지 줄줄이 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또 왜 그럴까요?
국가가 국채를 발행하는 것처럼 은행은 은행채를 발행해서 필요한 자본을 조달합니다. 상식적으로 대한민국이 망할 가능성보다 은행이 망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은행은 자금 조달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국채보다는 더 높은 수익률을 보장해야 합니다. 즉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 은행채 금리 또한 상승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고, 이는 은행의 이자 상환 부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은행은 이 부담을 채무자에게 전가하기 위해 각종 대출 금리 또한 줄줄이 인상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고금리 대출상품을 이용하는 주된 계층이 서민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결과적으로 민생지원금 살포로 인한 악영향은 돌고 돌아 서민들에게 직접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미래의 불확실한 손실보다 현재의 확실한 이득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들이 유별나게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난의 화살은 굳이 돌아가야 한다면 이들을 선동하고 호도해서 민생지원금의 효과를 과장하는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정권의 인기를 위해서 나라도, 미래세대도, 심지어 서민들까지도 팔아넘기고 있으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