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07. 플라야 델 까르멘, 멕시코
캐나다 토론토에서 멕시코의 칸쿤까지 비행시간은 3시간 남짓의 짧은 비행이었다.
우리는 오후 두 시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는데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출발시간이 저녁 여섯 시로 지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며칠 동안 일정이 꼬여서 이든이에게 "엄마,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까?"라는 말을 들은 터라
오늘만큼은 그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일찍 공항에 도착했는데 오히려 '지연'이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여섯 시에 출발한다면 밤 아홉 시쯤 칸쿤에 도착할 테고,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면 최종 목적지인 플라야 델 까르멘에는 오늘 안에는 들어갈 수 있겠구나, 하는 계산이 나왔다.
여행 19일 차, 시간'은' 부자 여행자인 우리 가족은 항공 지연으로 받은 쿠폰으로 밥도 사 먹고
우리의 사랑 '팀 홀튼'에서 커피랑 빵도 사 먹으면서 슬기롭게 공항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낮잠을 안 자고 버티던 이든이는 비행기를 타자마자 잠들었다.
여섯 시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는 일곱 시가 넘어서야 붉은 일몰사이를 날기 시작했다.
아... 오늘 안에 숙소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세 시간을 날아와 입국심사까지 마치고 수하물을 찾고 나니 이미 밤 10시 40분.
그나마 캐나다와 1시간 시차가 있어서 1시간 벌었다.
이제 플라야 델 까르멘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마자 훅! 하는 습하고 더운 공기와 택시 기사들의 호객이 쏟아졌다.
“버스는 이미 끊겼다”는 말과 함께 제시된 택시 요금은 무려 120달러.
‘헐… 그럴 리가. 그러면 안 되!’를 되네이며 꿋꿋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회사 앱에 표시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몇몇 사람들이 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동지가 생긴 듯해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20분쯤 지나 버스가 왔다. 오! 지저스. 감사합니다.
한 시간 넘는 거리, 정말 120달러 내고 가야 하나 싶어 졸이고 졸였던 마음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플라야 델 까르멘 터미널에 내려 다시 택시를 탔는데, 아.. 여기서도 호갱을 면치 못했다. :-(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새벽 1시가 넘었다.
너무 배가 고파 동네 편의점을 찾았지만 변변한 건 없었다.
결국 컵라면과 정말 맛없는 샌드위치로 대충 허기만 달래고 잠자리에 들었다.
지연과 거짓말, 그리고 호갱으로 점철된,
타코의 나라, 멕시코의 첫날 밤이었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7월은 그야말로 상상 이상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뜨거운 공기가 몸속까지 달궈버리는 듯했고,
습도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처럼 온몸을 짓눌렀다.
그늘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고, 우리의 피부는 하루하루 태양에 구워지고 익어갔다.
물을 찾아 헤매지 않고는 도무지 버틸 수 없었다.
다행히 숙소 옥상에 작은 수영장이 있어 우리는 매일같이 옥상으로 올라가 물속에서 겨우 숨을 돌렸다.
아… 이대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낮에 외출했다가 금세 기절할 듯 지쳐버린 뒤로, 우리는 해가 저물 무렵에야 거리를 나서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멕시코의 카오산로드라 불리는 ‘5번가’에서 스파이더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만났다.
함께 사진을 찍으면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멀리 피해 가려 했지만,
어느새 아들은 씨익 웃으며 가볍게 들어 올려져 있었다.
사진 딱 한 장 찍고 50페소(대략 4,000원)를 냈다.
"이든, 방금 사진 한 장 찍고 얼마 내었는지 알아?"
"얼만데?"
"네가 오늘 먹은 아이스크림(3,000원)보다도 더 비싸"
"아~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안 남았지만 사진 남잖아."
"아! 그러네“
아이의 말처럼 그 순간을 두고두고 기억할 사진이 남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러 장 찍을 걸 그랬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칸쿤, 플라야 델 까르멘, 메리다, 바야돌리드 등)는 쎄노떼가 유명하다.
쎄노떼는 고대 마야인들의 식수원이자 기우제를 지냈던 신성한 우물인데
현재 유카탄 반도에만 3,500여 개가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다.
수영을 전혀 못하는 나와 이든이지만 유카탄에서 쎄노떼를 안 가볼 순 없었다.
원래는 이든이의 이름과 같은 "에덴 세노떼(Eden Cenote)를 가보고 싶었지만,
물에 서툰 우리 둘에게는 무리가 될 것 같아. 가족 단위로 많이 간다는 아술 쎄노떼(Azul Cenote)로 향했다.
Cenote Azul)ㅜ
에메랄드 빛의 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이곳이 바로 아술 쎄노떼!
"Azul"은 스페인어로 파란색이라는 뜻인데, 이름처럼 물빛이 맑고 푸르러서 마치 보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쎄노떼에서는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 선크림 사용은 금지되어 있다. 덕분에 물은 더없이 깨끗하고 투명했다.
그럼, 이렇게 아름다운 곳 지켜야지.
아술 쎄노떼는 미리 알아본 것처럼 아이들 발이 닿는 얕은 구역부터 깊이 6미터에 이르는 곳까지 다양하게 펼쳐져 있었다.
서둘러 구명조끼를 입고 이든이에게 물에 들어가자고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바다에서 씩씩하게 놀던 아이라 당연히 뛰어 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무서워?”
조심스레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물이 너무 차가워…”
쎄노떼의 물은 바닷물과 달랐다.
햇볕에 데워지지 않은 지하수라서 늘 24도 안팎의 차가운 온도를 유지한다고 한다.
마치 땅속 깊은 곳에서 꺼내온 거대한 냉장고 같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유카탄의 공기 속에서 발끝이 물에 닿는 순간, 온몸이 전율하듯 시원해졌다.
이든이를 설득하다가 지친 우리는 결국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갔다.
곧 작은 물고기들이 몰려와 우리의 발을 쪼아대기 시작했다.
닥터피시였다.
신기하게도 큰 놈들은 내 발에 몰리고, 남편 발에는 작은놈들만 붙었다.
"발 좀 깨끗이 씻고 다녀~”라며 남편과 이든이는 나를 놀려댔다.
간질간질하다가도 가끔 톡 쏘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라 발을 빼고 싶었지만,
내 발의 각질 제거를 위해 꾹 참고 내어주었다. :-)
그렇게 발을 내어준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조이든 어린이가 물에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신나게 첨벙거렸다.
“오늘 물에 들어가면 500점이야! 칭찬 점수 만점 채우면 장난감 하나 사줄게!”
그 한마디에 바로 풍덩.
아… 한 시간 동안 애써 설득한 게 순식간에 무너졌다.
허무하기도 하고, 또 귀엽기도 했다. 아이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부모가 되려면 아직 멀었나 보다.
그날은 유난히 일몰이 아름다웠다.
아술 쎄노떼가 조용한 옹달샘 같다면, 셀하는 유카탄 정글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수중 놀이터였다.
입장료는 1인당 110달러가 넘으니 만만치 않지만, 그 안에는 액티비티와 식사, 음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물 위에서 놀고먹고 즐기라는, 올인클루시브 천국인 셈이다.
그러니 가장 먼저 할 것은 배를 채우는 일이었다.
배가 두둑해야 잘 놀지!
확실히 쎄노떼와는 다른 물 색이었다.
수린이 둘과 함께 가장 먼저 즐긴 액티비티는 튜빙이었다.
둥근 튜브를 타고 맹그로브 숲을 지나면 강물과 바다가 만나는 넓은 수역이 펼쳐진다.
그런데 물살이 너무 느려 이러다 하루 종일 떠 있을 기세. 결국 남편이 튜브에서 내려와 나와 이든이를 끌고 갔다.
수영장 강사처럼 힘차게 헤엄치며 우리를 이끌어가는 남편 모습을 보니 든든했다. :-)
잠시 후 남편이 수중 집라인에 도전한다며 선글라스와 모자를 나에게 맡기고 갔는데, 그 순간 일이 벌어졌다.
내 튜브가 집라인 코스로 흘러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직원은 비키라는데, 튜브는 내 말을 들을 리 없고…
게다가 잡고 있던 이든이 튜브를 놓치면 다시는 아이를 못 잡을 것 같아 다급히 물에 뛰어들었는데,
그 순간 내 튜브가 뒤집혔다.
남편의 선글라스는 그대로 물속으로 가라앉고, 모자만 겨우 건져냈다.
아……. 정말 그 순간은 정말 무서웠다. 나도 수영 잘하고 싶다.
놀란 마음은 음식으로 달래고, 다시 물로 뛰어들어 신나게 즐겼다.
셀하에서의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물 위에 둥둥 떠 있기만 할 수 있다면 훨씬 재미있게 놀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여전히 ‘사람이 어떻게 물에 뜰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루 종일 이어진 물놀이 덕분에 몸은 노곤했지만, 마음만큼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셀하는 단순한 놀이공원이 아니라, 정글과 강, 그리고 바다가 한데 어우러진 거대한 모험 왕국이었다.
유카탄의 여름은 덥지만 시원했고, 낯설지만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