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빛나던 우연의 밤

오타와, 캐나다, 23. 07

by 이미호


퀘벡이라는 드라마를 뒤로하고 우리는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로 향했다.

토론토가 캐나다의 수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나만 그런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캐나다의 수도는 오타와이다.

근데 왠지 '오타와'가 일본어처럼 느껴지는건 나뿐인가?


뭐, 어쨌든

오늘도 오타와에 무엇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만 오타와로 향한다.

나는 분명 J였다.

계획 세우고 일정 짜고, 정리하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긴 여행을 떠난 뒤로는 점점 P처럼 살아가는 중이다. 이렇게 오래된 습관도 바뀔 수 있다니.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까지 더해지는 우리의 여행이다.




오타와의 숙소는 대 만족이었다.

몬트리올과 퀘백은 비싸기만 하고 숙소 컨디션도 좋았다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오타와 숙소는 같은 돈 주고 만족도 두 배! 넓고 깨끗하고 렌지던스라 주방도 있었다.





무엇보다 아침 조식이 혜자 그 자체!

심지어 냉장고에 들고 나갈 수 있는 조식 패키지까지 있었다.
조식을 먹고도 또 하나 들고 나갈 수 있다니…이런 곳, 정말 처음이다.


사실 나와 남편은
‘숙소는 잠만 잘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질수록, 숙소의 컨디션이 여행 전체의 컨디션을 크게 좌우한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남미에서 하루 1~2만원만 더 투자해도 훨씬 행복했을 텐데 :-)
아쉬움 반, 깨달음 반의 순간이다.




잠시 만족스러운 숙소에서 쉬다가 밖으로 나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오타와에서 주어진 시간이 단 이틀. 그 생각에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이도 나도 겨우겨우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걷는게 몸에 익숙해진 우리 가족은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걷고 또 걸었다.

바이워드 마켓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쳐 있었다.

'차를 탔으면 되잖아! 버스도 있는데.....'

우리의 컨디션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었다. 뭘 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여행을 시작한 뒤 보름이 되도록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결국 늦은 점심을 먹고, 쇼핑몰에서 더위를 피한 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와, 모처럼 만에 편안한 침대에서 푹~ 쉬었다.

멕시코행 비행기 티켓을 이미 끊어놓은 상태라 일정은 빡빡했지만, 그럼에도 쉼은 필요했다.

긴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 480일이 남았다! 몇 군데 못 본다고 죽나?

장기여행을 단기여행처럼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자이기도 하니까.




숙소 근처 맥도날드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슬리퍼를 바람으로 마치 이 곳이 우리 동네인 것처럼 어슬렁 거려보기로 했다.

한낮의 열기가 빠진 도시는 조용하고 선선했다.

이런 산책이, 딱 좋았다.






숙소에서 10분쯤 걷자 국회의사당과 꺼지지 않는 불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낮에도 이 길로 걸었으면 되는 거잖아?"

그런데 왜 구글맵은 왜 우리를 그렇게 빙빙 돌렸던 것일까!?

구글맵의 배신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앞으로도 우리는 구글맵을 믿을 수 밖에 없을 테니까. 제발...

제발 배신을 조금만 덜 해주길.





국회의사당 잔디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고, 트럭들도 줄지어 서 있었다.

알고보니 곧 '라이트 루미에르'가 곧 시작된단다.

아니 이게 웬 횡재냐!

약 30분간 진행된 라이트 루미에르는 진짜 멋있었다.

그냥 불꽃놀이나 건물에 라이트를 쏘아 쑈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캐나다의 중요한 역사의 순간을 스토리 텔링 방식으로 풀어낸 공연.

한번은 불어로, 한번은 영어로.

영상도 성우의 목소리도, 흐름도 모두 몰입감이 대단했다.

가족 모두가, 홀린 듯 30여분의 시간을 보냈다.

우리나라도 이런 방식으로 역사를 가르치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낮의 휴식은 이 우연한 밤을 위한 큰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더 감동적이었던 순간. 우리는 앞으로 그런 우연들을 얼마나 만나게 될까?





다음날,

컨디션도 완충, 기분도 완충, 날씨까지도 완충되어 우리는 다시 부지런히 오타와를 즐겼다.





오타와 노트르담 대성당

오타와의 관광지들은 모두 도보로 이동가능한 거리에 있어서 부담이 없었다.

운 좋게도 리도 운하에 배가 들어오는 걸 볼 수 있었고,
지금도 옛날 시스템 그대로 작동하는 운하의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물론 요트 타고 가는 사람이 더 부럽긴 했다. :-))





오타와 노트르담 대성당도 멋있었다.

앞으로 우리는 몇 개의 성당을 더 만나게 되려나?

전날 놓친 어제 비버테일 원조 매장에도 들렀다.

기름없는 호떡처럼 생긴 비주얼에 맛은 달달해서 호불호가 없는 맛이었다.


전날과는 달리 우리의 발걸음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어제의 우리가 맞나 싶게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그래, 여행에도 쉼이 필요하다.





오타와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어린이 박물관이었다.

이곳만큼은 꼭 가야지. 마음먹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마감시간을 착각해 무려 한시간에 6만 원을 내고 놀았지만 좋았다!

그래도...."좋았으면 됐다."

숨 가쁘게 보낸 한 시간, 박물관 뒤편 마당으로 나가니 전통 결혼식 피로연이 한창이었다.

이젠 너무 형식에 갇혀버린 우리나라 결혼식과는 다른, 진짜 신나는 결혼식.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타와의 전부를 본 건 아니지만,

짧은 이틀 동안 만난 오타와는 '수도'라는 이름보다 훨씬 소박한 도시였다.

그래서 더 좋았다.

아마도 두고두고 기억될,

그 빛나던 우연의 밤 덕분일 것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