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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는 잊지만 나무는 기억한다

by 정영기

도끼는 잊지만 나무는 기억한다: 아프리카 속담


가해자는 쉽게 잊고 피해자는 오래 기억한다는 이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알지 못함)과 (겪은 상처)의 비대칭을 정확히 찌릅니다. 잊음은 사라짐이 아니라 보기 싫은 것을 밀어내는 마음의 버릇이고, 기억은 단순한 앙금이 아니라 ‘사실’을 붙드는 힘이죠. 이 문장을 불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상처를 지우거나 덮지 않고 어떻게 볼 것인가—어떻게 돌이킬 것인가의 길을 찾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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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연기와 업(karma)의 관점입니다. 상처는 한 사람의 순간 실수로만 생기지 않습니다. 말의 습관, 권력의 기울기, 주변의 묵인 같은 조건들이 겹쳐 ‘도끼의 순간’을 만듭니다. 가해자는 “잊었다”라고 생각하지만, 행위의 흔적은 종자(씨앗)로 남아 성향과 반응으로 되돌아옵니다. 반대로 피해자의 기억도 씨앗이 됩니다. 그것이 정견(현실을 바르게 봄)으로 숙성되면 자신과 공동체를 지키는 지혜가 되지만, 분노에만 붙들리면 번뇌의 고리를 키웁니다. 불교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이 기억을 어떤 씨앗으로 키울 것인가?”


다음은 정념(正念), 올바른 기억의 연습입니다. 정념은 망각이 아니라 정확히 기억하는 법입니다. 사건을 떠올릴 때 ‘사실–감정–욕구–행동’을 분리해 봅니다. “그때 그런 말이 있었다(사실). 지금도 가슴이 뛴다(감정). 나는 안전과 존중을 원한다(욕구). 그래서 오늘은 경계를 세우고 도움을 청한다(행동).” 이렇게 기억을 지도로 바꾸면, 과거가 현재를 집어삼키지 못합니다. 짧은 호흡 관찰과 몸의 감각을 확인하는 루틴은, 기억이 밀려올 때 발 딛는 자리를 되찾게 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자비와 참회입니다. 불교에서 용서는 망각이 아니라 기억 위에서의 선택입니다. 피해자에게 자비는 자기 파괴가 아니라 경계와 회복을 뜻합니다. 거리를 두고, 기록을 남기고,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가해자에게 자비는 부드러운 면죄부가 아니라 참회의 프로토콜입니다. 변명 없이 사실을 직시하고, 고통을 경청하며, 가능한 보상을 실행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계율의 갱신으로 자신을 묶는 것—그때 비로소 업의 씨앗이 멈춤과 배움으로 바뀝니다. 공동체 역시 침묵 대신 기록과 증언의 문화를 세워 숲이 함께 기억하게 해야 합니다.


정리하면, 이 속담은 불교에서 이렇게 들립니다. 무명은 잊으려 하고, 고는 기억 한다. 정념은 기억을 지혜로 바꾸고, 자비는 해의 고리를 끊는다. 잊음의 속도를 늦추고, 기억의 무게를 배움으로 바꾸는 작은 실천들을 오늘에 심어 보십시오. 그러면 상처는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함께 배운 흔적이 되고, 우리는 같은 자리를 다시 베지 않는 삶으로 조금씩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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