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압력' - 02화 '악몽'
그런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분주한 등굣길이어야 할 이 거리에 아무도 다니지 않는다.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화가 난 것일까.
그래도 내 손은 놓지 않는다. 등교 시간이 늦은 듯 해 잰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에게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리라.
곱게 양갈래로 묶은 머리 위의 선명한 핑크 리본 핀이 가냘프게 요동친다.
여느 때라면 하트모양의 플라워파츠로 장식한 하얀 크록스 신발의 발걸음이 가벼울 텐데,
작고 하얀 손가락이 빨개질 정도로 내 손을 잡으며
걷고 있는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익숙한 골목길이다. 아카시아 향 가득한 고등학교 돌담을 끼고돌면
아침마다 재잘거리는 아이들로 분주한 학교 앞 횡단보도가 나온다.
마음이 급하다. 서두르면 아이는 지각을 면하고 가뿐 한숨을 내쉬며 교실에 안착할 것이다.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4월의 한복판인데도 차디찬 냉기가 느껴진다.
길 건너 아이의 학교가 훤히 보이는 횡단보도 앞 도로가 시야에 들어온다.
.........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조잘거리는 아이들의 모습도, 교통지도에 쩔쩔매는 일일봉사 학부모들도.
학교 앞 저속운행 표시에 억지로 속력을 줄이는 자동차의 무리도, 아이들 리듬에 맞춰 종종거리는 참새도.
마치 완벽한 거리 통제를 마친 후, 유일한 도시의 생존자인 주인공의 첫 '테이크'를 기다리는 도로처럼.
애초에 존재한 적도 없이 존재하고 있는 텅 빈 거리는 기괴한 정적과 함께 '우리'를 빤히 주시하고 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진다. 숨을 쉬기가 곤란하다.
또다시 편두통의 맥놀이가 맹렬하게 춤을 춘다.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 횡단보도에 선연한 신호등이 깜박거린다.
아이는 힘없이 잡은 손을 놓는다. 플라워파츠로 장식한 크록스 신발은 잠시 주저하더니 길을 건넌다.
불길한 녹색 신호등의 그림자가 핑크빛 머리핀에 집요하게 어른거린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갑자기 암울한 정적을 깨고 고막을 찢는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음파의 끈질긴 공세에 나는 전율하고 경악한다.
놀랐을 아이의 모습이 예상외로 고요하다. 여전히 차분히 길을 건너고 있을 뿐이다.
소리의 주인공은 중년여성 같기도, 아니 10대 여고생 같기도, 아니 하이톤의 남자 목소리 같기도 하다.
혼란의 비명소리는 곧이어 웃음소리로 바뀐다. 모골이 송연한 소름 끼치는 웃음이다.
일체의 감정이 배제된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완전한 '무(無)'의 텅 빈 웃음이다.
나의 심장은 이제 감당이 안될 정도로 심하게 요동친다.
모든 걸 송두리째 파괴할 것 같은 이 소리의 음원(音源)은 바로 아이의 학교 건물이다.
아이를 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이의 걸음을 멈추게 해야 한다.
목청이 터져라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플라워파츠로 장식한 크록스 신발이 나에게 뛰어오게 해야 한다.
나는 곱디곱게 묶은 아이의 머리를 눈물 나게 쓰다듬으며 샛털같이 가벼운 무게를 가슴 한편 안으며
볕 잘 드는 우리의 보금자리로 꺄르륵 웃으며 돌아가야 한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는 나는 미친 듯이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성대가 뒤집히고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두 팔을 휘적거리며 나는 죽을힘을 다해
아이의 이름을 부르나 소리가 나지 않는다.
완벽한 묵음(默音)이다.
간절함이 통했을까. 아이는 '묵음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었다.
기괴한 웃음소리도 이제 멈췄다.
아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 시간이 억겁의 시간이다.
그리운 아이의 얼굴이 죽도록 보고 싶다. 제발. 제발.
‘아빠'에게 얼굴을 보여줘.
오늘은 꼭 보여줘. 나의 강아지, 나의 우주, 나의 생명.
어느새 오열하고 있다. 무너지고 있다. 소리치며 울부짖지만 완벽한 묵음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