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을 설계한다 -
“야, 너 진짜 타이밍 미쳤다.
어떻게 딱 그 타이밍에 저 말을 하지?”
친구가 말했다.
나는 웃었다.
하지만 대답은 안 했다.
토요일 오후 5시.
장소는 강남의 루프탑 와인바.
낮은 음악, 적당한 조도, 셀카 잘 나오는 벽 조명.
지금 이 모임의 주제는 스타트업 투자지만,
실제로 중요한 건 ‘누가 누굴 끌고 왔느냐’다.
나는 한 번도 ‘초대받은 적’이 없다.
항상 누군가를 데려오는 사람이었다.
왼쪽엔 VC 후배 하나,
오른쪽엔 얼마 전 알게 된 콘텐츠 스타트업 대표.
맞은편엔, 분위기 살릴 용도로 불러온
디자이너 출신의 여자 사람 하나.
이 조합은 ‘자연스럽게’ 우연처럼 만들어졌지만
사실은 어제 밤 내가 정리한 메모장 위 순서대로 앉혀진 구성이다.
후배는 대표와 네트워킹 욕심 있음
대표는 요즘 사람 만나는 걸 피곤해함 → 시각적 자극 필요
디자이너는 말 많지 않고 잘 웃음 → 분위기 완화
말 한 마디도, 자리에 앉는 순서도 나는 조율한다.
한참 대화가 무르익을 때,
디자이너가 내게 물었다.
“준혁 씨는... 연애할 땐 어떤 스타일이에요?”
나는 물을 마시듯 웃었다.
그리고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말했다.
“상대가 기대하는 만큼만요.”
그 말에 다들 웃었다.
누군가는 농담처럼 넘겼고,
누군가는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나는 둘 다 알고 있었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도,
그 반응 뒤에 어떤 감정이 남을지도.
모임이 끝나고,
디자이너는 인스타 DM을 보냈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편하게 얘기 나눠서 그런가? 다음에 또 봐요 :)”
나는 열어만 두고, 하루를 넘겼다.
익숙한 방식이다.
기대는 천천히 만들수록 오래 간다.
감정은 조율할 수 있다.
다만, 타이밍이 전부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생각했다.
오늘 4개의 네트워킹 라인을 만들었고,
후배는 나를 다시 한 번 ‘센스 있는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고,
대표는 내게 투자 검토 자료를 보낼 것이다.
디자이너는 한동안 나를 궁금해할 거고,
나는 필요할 때 다시 꺼낼 수 있다.
오늘은 상당히 효율적인 하루였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렇게까지 사람을 조율해야 해?”
“진심으로 다가가면 더 좋지 않아?”
그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진심은 통제되지 않는다.
나는 리스크를 싫어한다.
불확실한 감정, 뜻밖의 반응, 통제되지 않는 흐름—
그건 실패의 가능성이다.
나는 그게 싫다.
그러니까,
나는 계속 이렇게 살 거다.
실패한 적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