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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약의 아이콘 우리 엄니

사랑하는 엄니의 평안을 위해

by megameg

엄니는 90년을 사셨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의 엄니는

십 대 후반에 어려운 양 씨 집안에 시집오셔서 남편의 사랑을 받은 것도 아니고, 혹독한 시어머니 시집살이,

시누이 시집살이, 도련님 시집살이까지 요즘 말로 오지게도 시집살이를 하신, 강하지 않으면 절대 겪어내지 못했을 삶을 사시면서도 어려운 살림을 감당하셨고, 오 남매를 건사하며 살아오셨다.

결혼 후 35년을 보아 온 엄니는 삶에서 나오는 정말 알뜰살뜰한 그런 절약의 아이콘이셨다.

보통 어르신들의 모습일 수 있지만 울 엄니는 독보적이라고 난 생각한다.


자식들이 사 주거나 가끔 장에서 엄니 필요에 의해 사신 절대 싼, 좋은(?) 옷 모셔두기, 빗물 받아쓰기(온 마당에 커다란 함지박이 늘 널려 있다.), 해어진 옷 기워 입고 또 기워 입기, 얻어 입기, 자식들 안 입는 옷 입기, 무엇이든 더 이상 못 쓰게 될 때까지 사용하기, 웬만큼 상한 음식은 절!대! 못 버리고 '내 위는 고속도로'라고 하시며 당신이 드시기 등 다 언급할 수도 없는 평소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육신까지 그렇게 알뜰살뜰 낭비 없이 다 사용하고 가셨으니 그냥 절약이 아닌 거다.


그래도 쓰실 때는 경우에 꼭 맞게 미리미리 쓰셨다.

그래서 인색한 구두쇠나 자린고비라는 말은 절대 듣지 않으셨다.


몸을 너무 많이 쓰셔서 온몸의 뼈가 다 뒤틀리고 비틀렸고, 장기의 기능이 다 할 정도로 얇아져 위 천공,

마지막엔 대장 천공으로 고통받으시며 생을 마감하셨다.

당신 몸을 위해 수술은 고사하고 틀니까지 마다 하셨다.

수년 전부터 늘 하시던 말씀으로 쓸 만큼 썼고, 곧 죽을 텐데 뭘 그런 거 하냐시며 치과 다니기도 어렵다며 마다 하셨다. 엄니의 고집은 자녀들의 권유도 언제나 무색하게 했다. 자식들 돈 드는 것도,

당신의 몸을 그렇게 힘들게 다루시며 번 돈도 아까워서 언제나 임시방편의 치료만 하셨다.

안 그래도 아픈데 그렇게 힘든 몸으로 돈 벌어서 뭐 하려고 그러시냐고 여쭈었더니 나중에 나 건사해 줄 큰아들 줘야 된다 하셨다. 실제로 그러기도 했지만 옛날 어머니들이 그러셨듯이 큰 아들이 최고셨고, 또 그냥 안 쓰고 싶으신 거였다.


일어나지도 못하시면서도 엉덩이를 밀면서 밭에 나가 풀 뽑고 콩도 따셨다.

폴더 같이 접고서 네 발(?ㅜㅜ)로 라도 좀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엄니가 키우신 작물들을 들고 장에 나가 파셨다. 나중에 혼자는 힘드시니 엄니 돌보러 가 계셨던 누나(형님이라는 호칭은 너무 어렵고, 멀게 느껴져서 쓰지 않는다)에게 장에 갖고 갈 수 있게 덩어리를 만들어 들어다 달라고 하면서 까지 억척스럽게 돈을 버셨다.


보통 내 몸이 아프면 다 귀찮고 쉬고 싶기만 한데, 엄니는 진통제로 조금만 통증이 줄면 그렇게 일을 하셨다. 그 고집을 꺾지 않으시니, 속상하고 안타까운 자식들의 심한 걱정의 말을 들으면서도 절대 꺾지 않으셨다.

정을 떼려고 그러셨나?! 일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으셨나?! 아니, 어쩜 집착도 치매 초기 증상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땅이 있으니 끼니를 굶지도 않았고, 머슴을 두고 사셨고, 아버님은 농협에 근무하셨었고, 동네에서는 어느 정도는 사는 집이었다고 하는데도, 그런 절약의 지혜는 버리지 않으셨나 보다.

엄니의 그런 삶의 역사들이 자식들에게도 스며들어 있다. 큰누나도, 막내아가씨도 어쩜 저렇게 아껴 쓸 수 있을까 싶게, 요즘 사람 같지 않게 절약! 절약! 한다. 다 엄니에게서 흘러간 삶 속의 습관들이다. 뿐만 아니다.

아주버님이나 도련님은 같이 생활해 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내 여보에게도 그 습관이 남겨졌다.

티슈 한 장도 나눠서 사용한다. 필요에 따라 1/2로 잘라 쓰기도 하고 더 작게 잘라 쓰기도 한다.

난 왜 그러는지 이해를 못 했다. 막연하게 ‘아껴 쓰나 보다’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 습관이 엄니에게서부터 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엄니가 당신의 몸까지도 알뜰살뜰 다 사용하고 가신 지금에서야 '아하! 내력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걸 깨닫고는 '그것으로 더는 이상히 여기지 말자' 했다.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우고 살며 행해 온, 그 긴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엄니의 자제분들에게 다 담겨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 작은 절약들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닌데 물질이 풍부해진 지금엔 왠지 궁상맞게 느껴지고 쪼잔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이면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엄니는 어려운 살림을 살아내는 생활의 방편이었으니 절약할 수밖에 없었고, 아니, 절약이라는 말은 오히려 사치일 듯하다. 그냥 생활이었던 것이고, 그것을 보며 살아온 엄니 자제분들에게는 생활 속에서 늘 봐 온 절약이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으니 아직까지도 작은 낭비가 괜히 신경 쓰이고 죄책감이 드는 듯하다.

그러나 엄니도 자제 분들도 남들에게 그런 일들로 강요하거나 훈계하지 않으셨고, 않는다.

그냥 당신들만 그렇게 하며 사셨고, 산다. 그것이 또 감사로 다가온다.

강요를 하고 훈계를 했더라면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되고 가정 다툼의 원인이 되었을 텐데 그런 일은 없었고, 없다.

결혼 생활 35년을 엄니의 삶을 보아 온 내게도 큰 도전이었다. 그냥 전에 하던 대로 하면 왠지 맘이 편치 않아 귀찮아도 잠시 물도 잠그고, 휴지도 알맞게 쓰려고 노력하게 되었으니, 엄니의 긴 시간의 역사가 내게도 조금은 아~주 조금은 담아진 것인지?!

엄니가 떠나시고 난 지금, 엄니의 그런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젠 정말 제발 편히 지내시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 글을 쓸 당시, 모이토 토론 책이 환경 관련 책이라 절약도 환경 관련 문제 해결의 한 부분이라 생각되어 엄니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2022년 모이토 문집글로 낸 3편 중 하나다.

우리는 엄니(시어머니)와 엄마(친정어머니)를 일 년 사이에, 두 분 다 보내드리고 고아가 되었다.

어느덧 우리는 죽음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들이 되었고, 엄니나 엄마의 고통을 봐왔으므로, 두 분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으로 감사하며, 가족 모두 엄니를, 엄마를 편안히 보내드릴 수 있었다.

‘천수를 다 하셨다’ 생각했고, 그래서 눈물 바람이 아니라 조용히 평안을 빌어 들릴 수 있었고, 경건하게 두 분을 보내드릴 수 있었다.

고단한 육신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지만, 두 분의 영혼은 늘 평안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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