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다 보면 알다가도 모를 일이 주기적으로 생겨서 세상의 섭리를 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어떤 날은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고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 보이다가 또 어떤 날은 세상이 우중충하고 인간들이 왜 이 모양이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누군가 인간은 남의 욕창이 자신의 얼굴에 난 뾰두라지 보다 못하다고 생각한다는데 다소 시니컬한 표현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살면서 제일 안타깝고 화가 날 때는 세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성실히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휘저어 곤경에 빠뜨리는 상황을 보거나 겪는 것이다.
요즘은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서 그런지 예전보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자주 갖게 되는데 어떨 땐 결과적 아쉬움을 느꼈던 상황은 다른 선택을 가정해서 상상해보기도 하고, 어떨 땐 전쟁 같은 상황을 잘 돌파한 경우는 자부심을 곱씹으며 삶의 자신감으로 작용한다.
자신에게 가스라이팅하는 신조는 그래도 세상에 민폐를 주지 않으며 타인에게 좀 더 배려하는 삶의 스탠스를 갖고 있으면 세상의 섭리로부터 외면당하며 곤궁한 인생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거라는 보편적인 믿음 같은 것인데 이건 이기심이라기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의 손해에 대한 합리화이고 누구든 선천성에 기인하는 부분이 크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신조에 가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건 내가 직접 경험한 상황이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사고들을 보며 무가치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무리들이 고귀한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희생시키고도 별 탈 없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엄연한 현실이나 타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도움의 손길을 주려다 목숨을 잃게 되는 경우를 보면 세상의 섭리를 위한 공정한 운명의 신 같은 것이 있기는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아마도 최근에 책에서 읽은 '운명의 신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어느 작가의 논거가 이해하긴 힘들지만 현실에 투사해 보면 납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인 것 같아서 씁쓸할 때가 있다.
현재의 자신의 모습이나 처지는 그동안 인생을 살아가며 자신이 선택한 것의 총합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만큼 인생에서 결정적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적절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함의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에 이런 삶의 지표를 깨우치기는 쉽지 않다.
이 대목에서 사람이면 누구나 아쉬운 부분이 있고 잘못된 선택이 평생 동안 발목을 잡거나 먼 길을 돌고 돌아서 목적지의 길로 비로소 합류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른다.
나 역시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면 인생트랙의 직선주루를 벗어나 곡선주루를 오로지 힘으로 치달려온 것 같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그건 누구의 강요라기보다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 시엔 자신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주관적인 선택이 더 필요할 수도 있는데 다른 요소들에 더 신경 쓰며 타인의 관점에서 모두가 혜택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힘든 길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젠 이런 증세가 경미한 수준으로 완화되고 목표하지 않았던 다른 분야에서 성취한 부분도 크다 보니 별반 후회는 없지만 그래도 순간적인 선택의 오류들로 선천적 재능의 포텐을 터트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에 대한 나만의 아쉬움은 조금 남아있는데 어쩌면 '프로스트'<가지 않은 길>의 주제와 결이 비슷하거나 심리적으로 '자아팽창'에 기인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사고를 하게 되는 연차에 접어드니 예전보다 삶에 중요한 결정 시엔 신중하게 숙고하게 되는 편이다.
그건 삶의 속도도 중요하고 타인의 짐을 나눠서 지는 것도 때론 필요하지만 이젠 선택의 오류로 인해 인생행로의 바깥트랙으로 달리기엔 신체적, 정신적 지구력의 결핍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인생에 대한, 삶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하게 만드는 명제는 무수히 많지만 그중에서 내 마음속 세 가지를 열거하면 '삶은 의무다.' '삶은 고통이다.' '삶은 반항이다.'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어쩌면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타인들을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세상의 구조화된 부조리에 순응하며 사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명제가 함의하고 있는 주제의식을 갖고서 조율된 어떤 지점이나 상황에 맞는 선택지를 각자 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