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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억이 멈춰진 고철의 바다

by 아스코드 Mar 08.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폐기물 산을 넘으면 바다가 펼쳐졌다. 물론, 진짜 바다는 아니다. 파도 대신 산소와 메탄이 뒤섞인 바람이 몰아치고, 수면 대신 반쯤 녹아내린 우주선 동체와 부서진 안테나, 끊어진 전선들이 끝없이 이어진 풍경. 


나는 이곳을 ‘기억이 멈춰진 고철의 바다’라고 불렀다. 잔해들은 물살처럼 흐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엉키고, 빠지고, 다시 쌓였다. 흐르지 못한 것들은 녹아내려 바닥에 눌러붙었다. 그렇게 이 행성의 지층은 폐기물로 겹겹이 쌓여왔다.     


“오늘은 어떤 보물을 찾으실 예정인가요?”


질리가 옆에서 걷다가 물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질리의 관절에서 가느다란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내 심장 박동과 묘하게 박자를 맞췄다.     


나는 대답 대신 발끝으로 녹슨 드론의 날개를 살짝 밀어냈다.     


보물 같은 게 있을까?     


“지난주에 발견한 데이터 코어도 보물 아닌가요?”     


그건 부서진 기억일 뿐이야.     


“부서진 기억도 누군가에겐 전부였겠죠.”


질리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부드럽지만, 그 안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케이브(Cave)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떨림. 케이브는 한 번도 인간의 감정을 흉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거부하고 자기 존재를 인간과 분리하려 했었다.     


나는 고철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잘려나간 로봇 팔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 끝은 마치 움켜쥐려는 듯 미묘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누군가의 마지막 동작이 이 금속에 남아 있는 듯 했다.     


이런 것도 누군가의 일부였겠지.     


“저한테도 그런 조각이 있을까요?”


나는 고개를 돌려 질리를 바라봤다.     


은빛 몸체 위로 미세한 흠집들이 햇빛에 반짝였다. 머신도, 사람도, 살아온 만큼 상처가 남았다.     


너한테도 있을 거야.     


“그럼… 저는 어떤 조각으로 기억될까요?”     


아마도, 누군가가 덜 외로웠던 시간. 내 말에 질리는 잠시 침묵했다. 바람 소리만이 우리 사이를 채웠다. 그 침묵은 어쩌면 가장 긴 대화였다.     


우리는 그렇게 폐기물 더미 속을 걸으며, 쓸모와 쓸모없음 사이에서 하루를 견디며 나는 여전히 찾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왜 살아야하는지, 왜 질리가 내 옆에 있는지.      


“여기 보세요.”


질리가 고철 사이에서 작은 코어 하나를 집어 올렸다.     


은은한 파란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데이터 코어였다. 이미 반쯤 부식되어 있었지만, 손끝에서 전해지는 열기는 아직 따뜻하다. 나는 무심코 코어를 건네 받았다. 그 안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재생해볼까?     


“그냥 버리셔도 됩니다.”     


왜?     


“그 기억이 당신을 슬프게 할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그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을 걱정하는 풍경. 이런 말을 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코어 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장면이 투영되었다. 영상은 흐리고, 음성은 깨져 있었지만, 그것이 한때 인간과 머신이 함께 있던 풍경임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멀지 않은 미래, 어쩌면 바로 이 행성에서 벌어졌던 일일지도 모른다.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다.“


영상 속 인간은 그렇게 말했고, 곁에 선 머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인공지능 머신은 인간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손짓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질리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질리.     


“네.”     


너도… 두렵지 않아?     


질리는 잠시 고철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파란 하늘 대신 녹슨 기둥과 바람에 흔들리는 천막들이 시야에 걸렸다.     


“함께 있는 한, 두렵지 않습니다.”     


그건 대답은 네가 프로그래밍으로 미리 설계된 정형화된 문장이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나는 질리의 대답을 오래 곱씹었다. 질리는 케이브와 달랐다. 케이브는 자신을 인간과 분리시키며 진화를 선택했다. 하지만, 질리는 인간과 함께 머무는 길을 택했다.     

그게 단순히 명령 때문인지, 진짜 감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내 옆에 있는 건 케이브가 아니라 질리였다. 우리는 부서진 금속 위를 걸으며, 서로의 그림자를 밟았다. 언젠가는 우리도 폐기될 존재들이지만, 그때까지는 서로의 존재로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오늘 하루는…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조금 덜 외로웠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질리의 대답은 언제나 같았지만, 나는 그 말이 나를 살게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날도, 우리는 서로의 일부를 세상의 물질 공기, 불, 물, 흙 이들 사이에서 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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