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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엿)장수

1950

by 사일영 Mar 21. 2025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할아버지는 막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의 어린애였다. 전쟁이 터지자 외증조할머니는 첫째인 할아버지를 비롯해 그 아래 딸린 네 자식들을 끌고 본가로 갔다. 걸을 수 있는 애는 걷게 하고, 큰 애가 작은 애를 업었다. 외증조할머니는 지게에 이불짐을 올리고, 살림도구들은 이불짐 위에 올려 직접 그 짐을 짊어졌다. 가족들은 밤에는 노상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길을 이동했다.


전쟁이 터지자 식량과 물자가 뚝 끊겼고, 내 외증조모는 폭력과 굶주림을 피해 아래로 내려간 것이었다. 본가는 단양 바로 아래에 위치한 예천군이었다.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먼 길을 걸어 피난을 온 며느리를 본 예천 본가에서는 굉장히 난처한 기색이었다. 그래도 매정하게 빈손으로 보낼 수도 없는 일. 본가에서는 며칠간 끼니라도 하라며 쌀 한 말을 며느리에게 주었다.


외증조할머니는 까만 눈들이 자신을 올려다보는걸 느끼며 그 쌀 한 말을 이고지고 본가를 나왔다. 쌀 한 말로는 그 많은 식구들이 얼마 오래 먹지도 못할 것이었다.


증조할머니는 예천에서 빌린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받아온 쌀을 한 톨도 먹지 않고 전부 사용해 엿을 고았다. 그리고 장남이었던 할아버지를 불러 거리에 나가 엿을 팔라고 시켰다.


할아버지는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작 14살이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하방리 집을 버려두고 어머니를 따라 동생들을 이끌고 예천으로 오게 된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장남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들려준 엿을 짊어진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로 나가 엿을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해가 지기도 전에 가지고 간 엿을 다 팔았다.



할아버지는 이때 이야기를 이 이상 더 자세하게 해주지 않는다. 내가 어떻게 그걸 다 팔았냐고 물어봤는데도 그냥 팔았다고만 했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언급은 그 외에 전혀 없었다.


나는 그저 단양이 소백산 바로 아래 깊은 산골에 있는 마을이라 전쟁의 참화가 피해간 줄 알았다. 하지만 자료들을 조금 찾아보자 실제로는 나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이미 빨치산들은 소백산을 근거지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단양은 산골에 있어서 전쟁이 피해간 지역이 아니라 산 바로 옆에 붙어있는 바람에 오히려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마을이었다. 이후 전쟁이 터지자, 북한군은 서울을 지나 원주, 충주, 문경까지 순식간에 내려왔다.


7월부터 국군은 유엔군과 공조하여 충주와 제천, 단양에서 북한군과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교전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고, 일주일 가량 방어하다 곧 전선은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단양경찰서는 북한군에 의해 불탔고, 북쪽의 체제를 선전하기 위한 인민위원회 등이 설치되었다.


이후 낙동강까지 내려갔던 전선은 미국의 개입에 의해 다시금 북상하게 되었다. 그전에 피난갔던 사람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렇게 단양에 대한  공산당의 지배는 약 3개월만에 끝나게 되었다.


겨울이 되자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단양 옆에 있었던 의풍 지역에는 미처 이동하지 못한 북한군의 잔류세력이 남아있었다. 단양경찰서 대강지서는 북한군의 공격에 의해 불태워졌고, 이후 단양경찰서에 대한 습격도 있었다.


이후 1월에 인민군이 내려오면서 밀려난 국군과 미군은 강을 건너 단양으로 철수했다. 단양군 영춘면의 중심지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주민들은 피난을 가고자했으나, 미군은 충북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근방의 도로를 탱크로 봉쇄하고, 일반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하여 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도 없게 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집에서 지내기에는 너무 위험했고, 주민들은 각자 땅 속에 파놓은 방공호나 산 속에 있는 굴 등에 숨어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군 사령관은 단양의 영월, 예천, 풍기 등 소백산 일대에 대해 적군이 은신처로 이용할 만한 주거지를 모두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미군 측 자료에 의하면 단양과 예천에 이르는 지역의 75%를 불태워버렸다고 했다.


단양 영춘면의 곡계골 비극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1951년 1월 20일, 미군에 의해 수행된 단양 영춘면에 대한 공중폭격에 의해 곡계굴에 은신해 있던 민간인들이 희생된 사건이다.


곡계골은 크고 넓은 동굴이라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따뜻하고 안전한 곳이라 여겨졌다. 단양 사람들 뿐 아니라 영월 등에서 온 피난민들도 여기에 머무르고 있었다. 굴 안에는 사람들이 머물렀고, 굴 입구에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가재도구들과 살림들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이 끌고 온 소나 닭 등 가축과 농사용 달구지들이 함께 그 앞에 묶여있었다.


미군은 공군에게 <곡계골에 인민군이 숨어있으며 그들의 달구지가 함께 발견되었다>며 이곳에 대한 폭격을 요청했다. 1951년 1월 20일, 미공군은 곡계굴에 대한 공중폭격 작전을 수행했다.


굴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은 미공군기가 낮게 놀자 깜짝 놀라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아이들이 얼마 들어가지도 않아 전투기는 굴에 대한 네이팜탄 폭격을 시작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굴 내부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은 미 공군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대부분 불타거나 질식사하였고, 굴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굴 주변을 훑는 기총사격에 의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그리고 그 중 극소수만 생존했다.


사건발생 1주일 후, 미군이 곡계굴에 와서 당시 피해상황 등을 조사했다. 하지만 미군에 의한 후속 조치는 따로 없었다고 한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 곡계골 폭격 사건의 전체 희생자는 200명을 넘었다.



이 사건에 대한 자료들을 보고 HBO드라마 <제너레이션 킬>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제너레이션 킬>은 실제로 이라크 전쟁에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에반 라이트의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하는 다큐에 가까운 드라마이다.) 2003년 이라크전쟁 때 미군의 잘못된 정보에 인해 평화롭던 마을 하나가 순식간에 폐허가 되는 장면이었다. 여자와 아이들이 평화롭게 집안일하고 노닐던 마을 하나가 1분만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도 변해버리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HBO 시리즈 <제너레이션 킬> 에피소드3 中HBO 시리즈 <제너레이션 킬> 에피소드3 中


드라마 속 미군 주인공들에 이입해서 보고 있던 나는 주인공들과 같이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크게 경악을 했었다. 그런데 현실은 한순간에 삶의 터전과 가족 재산 목숨을 잃어버리는 이라크 주민들이 우리 쪽의 입장이었다니…….


HBO 시리즈 <제너레이션 킬> 에피소드3 中HBO 시리즈 <제너레이션 킬> 에피소드3 中



생각해보면 2003년에도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50년 전 한국전쟁때라면 더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긴 했다. 이 일이 내 할아버지가 겪었을수도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보면 대단히 끔찍한 감정이 들었다.


이런 자료들을 본 이후, 나는 이 시절에 단양에 살았던 할아버지에게 전쟁 때 일에 대해 묻지 않기로 했다. 14살이면 어리긴 하지만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은 얼추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았다면 정신적 충격이 어마어마할 것임에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더 캐묻고 싶지 않은 생각이었다.




어쨌든 엿팔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할아버지는 외증조할머니가 만든 엿을 그 가져간 날에 다 팔았다. 할아버지가 엿 판 돈을 가지고 오자, 외증조할머니는 그 돈으로 잡곡을 조금 사고 다시 쌀을 샀다. 그리고 다시 엿을 고아서 할아버지에게 팔게 했다.


할아버지가 낮동안 엿을 팔아오면 외증조할머니는 그동안 아이들을 돌보고 다음날 장사를 준비했다.


그 당시에 할아버지가 엿을 많이 판 고객은 전쟁 막바지에 고향으로 올라가면서 예천에 들러가던 군인들이었다. 부산에서부터 위의 고향으로 올려가던 거지꼴의 군인들이 있는 동전들을 털어 엿을 조금씩 사갔다. 동전뿐만 아니라 군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과 엿을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예천에서 지내던 가족들은 상황이 나아지자 다시 원래 단양 하방리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 외증조할아버지 언급이 없어서 이미 돌아가신 건가? 했는데 타임라인을 따져보니 아직 살아있는 상태였다.


근데 외증조할머니가 전쟁통에 엿 만들고 어린 아들이 길에 나가서 엿 파는 동안 외증조부는 뭐했냐고 엄마한테 물어보니 그 분은 원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외증조할아버지도 전쟁 때 예천까지 따라갔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 모양 빠지게 뭘 그런 짓을 하냐는 식이었다. 외증조부는 원래도 그냥 외증조할머니에게 빌붙어사는 빈대였다.


외증조할머니가 시장판에 가서 떡 팔고 국수 팔면서 애들을 먹여살리는 동안에도 외증조할아버지는 그냥 방안에서 곰방대만 피우고 있었다. 그 사람은 평생 어른입네 하면서 일도 안하고 주는 밥만 받아먹고 살았다.


할아버지는 외증조할아버지가 죽는 날까지 부양했다.


도리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거기에 내 할아버지는 책임감도 강한 성격이다. 손해보더라도 자기 책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였으면 아버지고 뭐고 벌써 지게에 지고 내다 버렸을 것이다.






[참고문헌]

단양군, <단양군지>, 제1편 역사, 2005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단양 곡계굴 미군폭격 사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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