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열차

고향으로 가는 길-2

by 애린 이종희

예민하게 지켜보던 날씨가 급변한 것은, 고향으로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였다.

숨 가쁜 현실을 뒤로하고, 네 남매가 시간을 맞춘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태풍이 온다고 해도 고향행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싱그러운 날이 번식해 가는 이 좋은 계절에, 고향 맛집 투어까지 계획하며 한껏 부풀던 마음에 거품이 빠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연휴 내내 비를 동반한 강풍이 머문다는 예보가 요란해도, 서울에서 여수까지 고속도로는 행락차들로 가득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잿빛 농도가 짙어가던 하늘에서,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수 식당에 미리 주문해 둔 장어탕과 장어구이를 찾아, 돌산 펜션에 도착하자 두 동생이 흠뻑 젖은 채로 마중 나와 있었다. 바람을 견디지 못한 우산이, 흙비린내가 질펀한 정원으로 다이빙을 했다나...


날씨로 계획이 변경되었을 때,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은 동네 마트 식품관의 한 귀퉁이를 털어, 약간의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아쉬운 대로 저녁상을 차리는 사이, 오빠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남매들이 회포를 풀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채워 섬으로 들어가자던 계획이, 섬으로 먼저 내려가신 사촌 오빠의 갑작스러운 전화로 끝이 났다. 폭풍주의보로 오후 뱃길이 끊겼다는 것이다.


밤사이 뒤척임도 무색하게, 이른 아침 전화기로 들리는 해운회사의 반복적인 멘트는 전 해상 운항 중단 소식이었다. 이제는 꼼짝없이 뭍에 갇히게 되었다고 술렁이는데, 이번에는 사촌언니가 화태리에는 아직 건너는 배가 있다는 정보를 흘렸다. 설령 갈 수 있다 해도 겁이 나고, 갈 수 없다 해도 난감한 이 상황에서, 모험은 어쩔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강행되었다.




야간열차 (2015)


오래전, 명절을 쇠러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전라선 열차에 몸을 싣던 날

미리 예매할 수 없었던 좌석표 대신

극적으로 산 입석표 한 장 들고

겨우겨우 기차를 탔다.


입석은 맨 끝 좌석 뒤,

좁은 공간을 차지할 수 있다면

특석이나 마찬가지다.

대부분 통로에 서 있거나

화장실 앞에 서 있기도 하고

기차와 기차 연결 통로에 기대어 선다.


아무리 내 자리가 확보되어도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달걀 왔어요."

"땅콩 왔어요."


아저씨의 목소리는

이제 곧 음료수와 군것질거리들을

가득 실은 손수레가 등장한다는 신호이다.

신문 깔고 앉았던 사람은 일어서야 하고

좌석표 주인이 내준

팔걸이에 앉아 있던 사람도 일어서

세상에서 제일 유연한 몸동작을 취해야 한다.


수원, 대전을 지나고

전주, 남원을 지나고

곡성도 지나면

녹색 의자가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그 자리가 내 차지가 되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푹신한 의자에 앉아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을 닫고서

스르르 단잠에 빨려든다.


“여기는 순천, 순천입니다.”

'내리실 분은 미리 짐을 챙기라'는

안내방송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창밖을 본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

구정 설 때는 여전히 깜깜하지만

추석 한가위 때엔 산등성이 따라

아침노을이 출렁인다.


그 풍경을 보노라면

간밤에 치르던 전쟁은 악몽이었다고

쉽게 털어내고는 경직된 몸을 뒤척여

기차가 종착역에 닿기 전에 출입구에 서 있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우리는 어쩌다

고향을 그 섬에 두고 떠나와

뱃길의 안부를 물어야 하고

뱃길이 열려야만 안도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여객선 터미널에 가득 찼고

그중에 친구라도 만날라치면

흘러간 세월쯤은 얼마든지 돌이켜

그때 그 시절로 내달릴 수 있었다.


여기는...

군내리입니다.

화태리입니다.

두라리입니다.

유송리입니다.

우학리입니다.

미포입니다.

안도입니다.

심장리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서고지입니다.


건너온 바다의 거리만큼

해는 느릿하게 중천에 떠 있는데

서고지라 내린 곳은

섬이 아닌 바다 위에 뜬

작은 *종선이었다.


저 멀리 부둣가엔 엄마 모습이 보인다.

내가 밤새 야간열차를 타고

멀고 먼 공간을 지나오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쑥떡을 만드시고

조청을 고시고

내가 좋아하는...

좋아하는 음식을 만드시며

무사히 돌아오라고

빌고 또 비시느라

하얗게 밤을 새운

울 엄마 모습이 보인다.


그 시절

우리가 보았던 건 환영이었을까.

여전히 밤차는 떠나고

여전히 명절은 다가오는데

우리가 보았던 그 많은 풍경은

어디에서 찾고

우리는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우리가 서 있는 이 공간은

위태하게 몸을 실은

입석표 자리인지도 모른다.

떠났던 많은 것들처럼

우리를 실은

밤기차의 기적 소리는

의식을 깨우고

꿈을 깨우며

오늘도 쉼 없이

달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종선/ 섬이나 육지 항구에 큰 배가 닿을 수 있는 접안 시설이 없을 때,

큰 배에서 사람이나 짐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


단편으로 읽으셔도 무리 없게 설정하였지만

프롤로그를 참고하시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