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에서 온 편지>
재일교포 홍순자 할머니는 요양원 207호에서 생활하셨던 분이다.
홍순자 할머니는 전라남도 나주 영산포에서 태어나셨다고 하셨다. 나주 영산포에서 태어나신 후 3살 즈음에 일본으로 오셨다고 했다. 그때가 약 100년 전이니 일제 강점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일본에 오셨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 오실 때, 할머니에게는 아직 갓난아기였던 남동생이 있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일본에서 계속 지내셨으나, 남동생은 한국이 독립을 한 후 한국에서 살겠다며 전라도 나주로 가셨다고 했다.
당신은 고향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지만, 그간 살아오면서 동생을 만나러 자주 한국에 가셨다고 했다. 사실 할머니는 자주라고 표현하셨지만 근 100세가 되실 때까지 대여서번 정도 나주 영산포에 방문하셨던 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본인의 고향은 전라도라고 항상 말씀하셨으며, 한국에 방문했던 당시의 이런저런 모습에 대해서 나에게 자주 말씀을 해 주셨다.
그런 마음이 애틋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모국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항상 나에게 잘 전달되었다.
할머니의 방에 가 인사를 드릴 때면, 할머니는 항상 작은 액자를 손으로 쓰다듬고 계셨다. 작은 액자 속에는 이미 색이 바래 누르스름해진 편지 한 장과 3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사진이 함께 들어 있다.
할머니의 하나뿐인 남동생 사진이다. 편지는 액자 속 할머니의 남동생에게 오래전에 받은 편지라고 내게 말해주신 적이 있다.
남동생은 할머니보다 먼저 하늘로 가셨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런 남동생이 항상 너무 그리웠던 모습이었다. 할머니로부터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지만, 간혹 남동생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해 주셨다.
할머니는 당신의 고향에서 삶은 매우 짧았지만, 전라도 사투리를 잘 사용하셨다. 아마도 부모님으로부터 배운 모국어일 것이다. 나주의 끝없이 펼쳐진 논밭에 관한 이야기, 예전 영산포구의 이야기 등을 하실 때면 할머니의 눈빛은 언제나 초롱초롱 빛이 나는 듯했다.
홍순자 할머니는 99세의 연세로 얼마 전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와 할머니의 짐 등을 정리하러 할머니의 방에 들어갔다. 며칠 전까지 침대 맡에 앉아계셨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러나 이제 텅 빈 침대와 작은 서랍장 하나만이 덩그러니 남아 방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작은 서랍장 위에 놓여있는,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작은 액자가 눈에 보였다. 항상 보던 액자이지만 오늘따라 더 애틋하게 보였다. 액자 속의 남동생과 남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가 아직도 할머니에게 안부를 전하는 것 같았다.
누님.
건강히 잘 계시는지요.
저는 매일 보고 싶은 누님을 생각하며
잘 지내고 있습니다.
누님 교회는 잘 다니고 계시는지요.
저는 오늘도 교회에 가서 누님을 위해서 기도하고 왔습니다.
일본에서도 예수님을 잘 믿으며 신앙생활을 잘하시길 바랍니다.
누님,
우리가 서로 너무 먼 곳에 떨어져 있어서
자주 만날 수 없지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생각하면서
그날만을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님,
너무 보고 싶습니다.
- 영산포에서 동생 ㅇㅇㅇ 올림.
3~40년은 족히 지난 듯 노랗게 색이 바랜 편지지가 행여 찢어질까 두려워서였을까.
오래된 사진과 오래된 편지를 작은 액자에 넣어, 침대의 머리맡에 항상 두었던 할머니.
가끔 방에 홀로 앉아 액자를 만지며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던 할머니.
오래전 먼저 돌아가신 남동생이 그리워
손으로 눈으로 만남을 이어가셨던,
99세의 재일교포 홍순자 할머니는 얼마 전 돌아가셨다.
이제는 빈 침대와 작은 액자만이 쓸쓸하게 방에 남아있다.
할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할머니는,
그리운 동생을 만나셨을까?
만나셨기를...
죽음...
이 얼마나 허망하고 허무한가.
그러나
보고 싶은 동생을
만나는 여행이라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정인가.
죽음.
그 허망하고 아름다운 이별이여.
부디...
아름다움의 무게가 더 클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