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괜스레 옷깃을 여미게 하던 1998년 추석, 온 국민이 민족 대이동에 나설 때였다. 꽉 막힌 고속도로는 ‘가족 만날 생각에 싱글벙글’ 모드와 ‘차 안에서 늙어가는’ 모드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짜릿한 현장이었다. 하지만 경찰, 소방관, 군인들에게 그런 로맨틱한 교통체증은 남의 나라 이야기. 우리에게 추석은 그저 ‘비상근무’라는 거대한 족쇄 아래 강제 합숙 훈련에 돌입하는 날일 뿐이었다. 기름진 전 냄새 대신 가게에서 사온 라면냄새가 가득했다. 명절에 당연한 소방서 한가위 만찬이었다.
당시 소방관 근무 시스템은 24시간 근무 후 24시간 휴식, 갑부와 을부로 나뉘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허나 명절 앞에서는 그런 ‘휴식’ 따위 사치였다. 갑, 을부 모두 비상 대기! 집에 잠깐 들르는 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내 집이 곧 소방서다!”라는 웃픈 구호가 뼛속까지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때, 우리 소방서의 분위기 메이커이자 인간 비타민이었던 선배 영재 형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야, 늬들 미팅 안 할래? 내가 00기업 아가씨들 섭외해 놨다!”
비상근무에 찌들어 연애세포가 겨우 숨만 쉬던 우리에게 그 말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진짜요? 어디서 꼬셨어요?”
“00기업 사무실 지나가다 봤는데, 싹 다 괜찮더라. 특히 가운데 앉아 있던 아가씨, 완전 내 스타일.”
그 순간, 동기 명수의 눈이 레이저처럼 번뜩였다.
“형님! 저도 저번에 거기 볼일 있어서 갔었는데, 가운데 앉은 분이 진짜… 후!”
영재 형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야, 너 저번에 00농협 아가씨랑도 썸 타지 않았냐?”
그러자 명수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으로 받아쳤다. “형님, 다다익선이라고 했습니다! 선택은 많을수록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명수를 '소방 연애 마스터'라 불렀다. 넉살 좋은 입담은 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고, 그의 농담 덕분에 긴장된 출동 전 대기 시간도 웃음꽃 피는 시간으로 변하곤 했다. 하지만 명수는 단순히 유머러스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굳건한 책임감이 그의 심장을 지탱하고 있었다. 작은 장비 점검부터 위험천만한 화재 진압까지, 자신이 맡은 일은 밤샘을 해서라도 완수해내는 사람이었다.
화재 현장에서 그의 진가는 더욱 빛났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그는 맹수처럼 날렵하게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인명을 구조했고, 동료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빈틈없이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평소에는 잘 웃고 농담을 즐기던 모습은 위급한 상황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는 '연애 마스터'라는 가벼운 별명 뒤에 숨겨진, 묵직한 존재감을 가진 진짜 영웅이었다.
그렇게 그의 주선으로 우리는 미팅을 갖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약속 장소로 향했지만, 선배가 은밀하게 속삭였던 ‘괜찮은 아가씨들’이 대체 무슨 의미였는지는, 곧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미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우리는 마치 소풍 전날 초등학생처럼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영재 형이 말했던 ‘괜찮은 아가씨들’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팅은 예상보다 훨씬… 다사다난했다. 마치 야생동물원 탐험을 마친 기분이랄까. 그러나 어제 근무하고 오늘 비상근무 후에 미팅을 해서인지 젊은 청춘들도 파김치가 되서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철수와 재영이는 광주로, 명수는 전북 순창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뻐근한 몸을 겨우 일으켜 출근한 철수는 왠지 모르게 쎄한 기운을 느꼈다.
사무실은 평소와 달리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묵직한 침묵이 공기를 짓눌렀다.
“명수가… 출근하다 교통사고로…”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하는 전날 근무 직원의 떨리는 목소리에 철수는 멍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 “다다익선!”을 외치며 희희낙락하던 녀석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니. 믿을 수 없었다. 마치 드라마 속 한 장면 같았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는 잔인하게 현실을 상기시켜줬다.
바로 그때, 철수의 자리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안녕하십니까, 곡성119소방파출소 김철수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어제 미팅에서 명수와 짝이 되었던 그녀, 미정이었다.
“저… 철수 씨, 저 미정이에요. 어제 명수 씨랑 짝이 됐었는데… 명수 씨한테 명절 음식 좀 갖다 주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되네요. 혹시 출동 나갔나요?”
철수는 숨을 턱 막혔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차마 ‘사망’이라는 두 글자를 입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지금… 병원에 있어요.”
“아, 그래요? 그러면 나중에 돌아오면 연락 좀 하라고 전해주세요.”
미정의 밝은 목소리가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미정 씨. 명수가… 많이 다쳐서 병원에 있어요. 출근길에… 교통사고가 났어요.”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곧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어디 병원인데요? 많이 다쳤어요? 괜찮은 거죠?”
철수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미정 씨… 명수가… 사망했어요.”
그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터져 나오는 격렬한 울음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흐느낌은 현실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철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수화기를 조용히 내려놓을 수밖에.
추석, 모두가 가족의 품에 안길 시간, 철수를 비롯한 동료들은 억지로 솟아오르는 슬픔을 억눌렀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그들의 감정을 짓눌렀다. 소방관에게 슬픔은 사치였다. 국민의 안전, 그것이 그들의 심장에 새겨진 단 하나의 명령이었다. 억지로 삼킨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들은 화염 속으로 환자 이송으로 바쁘게 뛰었.
퇴근길,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짓눌렀다. 장례식장, 그곳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이었다.
명수의 교통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구조대원이, 그의 친형이었다는 사실. 메마른 입술을 겨우 움직여 이름을 부르던 형의 절규가 귓가에 맴돌았다. 순창119구조대 소속, 그는 헬멧 속에서 울음을 삼키며, 차가운 동생의 손을 잡아야 했다. 필사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그의 두 눈에 담긴 것은 형의 눈물이 아닌, 구조대원의 절망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동생을 자신의 손으로… 죽어가는 동생을… 꺼내야 했다. 그 어떤 신음도, 흐느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다만 굳게 다문 입술만이 그의 고통을 짐작하게 했다. 동료들은 감히 위로의 말조차 건넬 수 없었다. 그저 그의 곁을 묵묵히 지킬 뿐.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함께 무너져 내렸다.
명수의 빈자리는 거대한 구멍처럼 뻥 뚫려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 그의 격려, 그의 땀 냄새… 모든 것이 생생하게 남아, 더욱 아프게 했다. 하지만 슬픔에 잠길 여유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새로운 신고가 접수되면, 그들은 다시 방화복을 입고, 헬멧을 쓰고, 출동해야 했다. 또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그들은 슬픔을 뒤로하고 달려 나가야만 했다. 그것이 소방관의 숙명이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더욱 절실하게 느꼈다. 서로의 눈빛에서 슬픔을 읽고,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며, 서로의 침묵을 이해했다. 함께 웃고, 함께 울고, 함께 절망하고, 함께 희망을 품으며,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버텨나갔다. 그것이 소방관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시간의 강물은 쉼 없이 흐르고, 철수의 마음 한켠에는 빛바랜 사진처럼 명수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희미해져 가는 줄 알았던 기억의 조각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게 떠올라 그의 가슴을 후벼팠다.
과거, 함께 웃고 울었던 날들, 고된 시간을 서로 의지하며 버텨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철수는 문득, 명수의 굳건한 눈빛과 따뜻한 미소를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다는 강렬한 갈망에 휩싸였다.
그리움은 마치 오랜 시간 묵혀둔 와인처럼 깊고 진해져, 철수의 온몸을 휘감았다. 사무치는 보고픔에 목이 메어왔고, 명수의 이름 석 자는 텅 빈 가슴을 울리는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철수는 깨달았다. 시간은 추억을 퇴색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깊고 애틋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그리고 오늘, 그는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명수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