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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맨틀식 「산청 해물탕」

50센티쯤 되는 괴물 로브스터를 삶아 국물을 내고,

by 정건우

프리맨틀 「산청 해물탕」 / 정건우


뉴맨 공항을 이륙, 지옥의 상공을 가로질러 우리는 다시 퍼스로 돌아왔다. 섭씨 사십 이도, 수백만 개의 바늘이 양팔과 목덜미를 무자비하게 찔러대는 햇볕 속에서 탈출한 것이다. 열풍이 몰아치는 찜통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햇살이 찔러대는 통증의 더위는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요구르트를 마시며 일행은 공항 라운지에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호주 출장 나흘 째, 힘들었던 설비 가동상태 확인을 끝내고 판정하는 일만 남겨놓았다. 호주 2위의 환경설비업체 인수를 위한 출장 일정에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뉴맨 현장 더위에 질려 강행군했던 결과였다. 어차피 맞을 매라면 한꺼번에 몰아서 맞자는 나와 S 부장의 의견에 대표가 동의한 것이다. 업무 차 수없이 호주를 드나들던 대표도 이번 더위에 두 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호텔로 가는 택시 안에서 내가 중얼거리듯 한마디 했다.

“오늘 저녁은 또 뭘 먹어야 하나?”

대표가 양 손바닥을 펴며 어깨를 으쓱한다.

“그러게 말이오”라는 뜻이다. 며칠간 시달린 더위 속에서 우리는 완전히 입맛을 잃었다.



햄버거와 호주식 스테이크에 뉴맨의 더위를 버무려 먹다가 그만 식욕을 은 일행 셋은 오늘 저녁 꼭 한식을 먹자고 의기투합하였다. 스완벨 타워 인근 레스토랑 거리에서 한식당을 봤었노라며 대표가 바람을 잡는다. 일행은 조금 일찍 나서며 맛 부활 기대에 잔뜩 들떠 있었다. 널찍하고 깨끗하며 정비가 잘 된 퍼스 시내는 공간 배치의 넉넉함이 주는 시각적 시원함이 좋았다. 중세 분위기의 런던 코트, 피카소와 르누아르, 고흐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서호주 미술관, 경관이 기막힌 스완벨 타워, 그리고 도심 속의 숲이라는 킹스 파크에서는 공룡 발자국도 볼 수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오직 한식에만 집중하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은 이런 경우에 딱 들어맞는 진리 중 진리였으니.



한데, 스완벨 타워 인근의 레스토랑 타운 어디에도 한식당은 없었다. 큰소리쳤던 대표의 당황해하는 표정이 몹시 미안할 정도로 민망했다. 나는 애써 위로하며 이왕 걷는 것, 더 걷다가 아무것이나 먹자고 했다. 언제 이런 경험을 해 보겠냐는 너스레에 타이트한 성격의 대표도 맘을 늘이는 모양새다. 저녁 여덟 시가 되기도 전에 다운타운 전체가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야말로 한순간에 뚝 끊겼다. 또 다른 퍼스의 밤 풍경이다. 어둡고 한산한 퍼스 시내의 거리. 사람들은 일찍 가정으로 돌아가 그곳에 불을 밝히는 모양이었다. 거의 두 시간 반을 헤매다 우리는 문 닫기 직전의 햄버거 집에서 십오 센티도 넘는 높이의 햄버거를 시켜 뜯어먹어야 했다. 오늘도 속은 느글거렸다.



하루 일정을 단축했으니 항구도시 프리맨틀을 구경하고 거기서 한식당을 찾아보자고 대표가 제안한다. 마다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솔깃한 제안이다. 우리는 충분히 잔 후 호텔 조식을 먹고 점심을 건너뛴 채 퍼스 역으로 향했다. 프리맨틀은 퍼스 역에서 삼십 분 정도 걸린다. 스완 강과 인도양이 만나는 프리맨틀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단다. 마치 형산강과 동해가 만나는 죽도시장 부근의 포항 같은 느낌이랄까?. 우리는 프리맨틀 캣(Fremantle Cat)이란 시내 순환 무료 버스를 타고 시내 이곳저곳을 구경하였다. 라운드 하우스, 해양 박물관과 프리맨틀 마켓을 구경하고 약간의 선물을 산 후, 카푸치노 스트립(카푸치노 거리) 노상에서 커피를 마시며 즐거운 여유로움도 만끽하였다. 대표가 어젯밤 숙소에서 꼼꼼하게 알아본 한 식당은 항구 근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적한 길 옆에 있었다. 늦은 오후였다.



「산청」이라는 검은색 상호가 흰색 페인트를 칠한 작은 베니다 합판에 흘려 쓰여 있었다. 홀 내부는 다섯 평이나 될까?. 우리 시골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조촐한 실내에 다소 실망하고 있는 데, 메뉴도 정식과 비빔밥뿐이란다. 40대 중반의 여사장은 오랜만에 한국 손님을 만났다며 들떠있었다. 해물탕을 먹고 싶은 데 가능하겠냐고 대표가 물었다.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했다. 재료를 알아보겠다며 사장은 냉장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나는 입안에 침이 고이며 잔뜩 흥분하였다. 그런데 아뿔싸 새우가 없어 해물탕은 어렵겠다고 한다. 국물 맛이 안 나서 음식으로 내놓을 수가 없다며 사장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였다. 새우를 대체할 만한 다른 재료가 없느냐고 물으니, 억지로 갖다 붙이면 바닷가재가 있긴 한데 크고 비싸서 내놓기가 무엇하다며 사장이 주뼛해한다.



50센티쯤 되는 괴물 로브스터를 푹 은 국물에 오징어, 이름 모를 게, 조개류 몇 가지, 버섯, 무, 고추, 대파, 두부, 마늘, 이름 모를 채소 등등이 투입된 해물탕은 냄새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우리는 석 달 열흘을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삶은 바닷가재의 두툼한 살을 고추냉이에 찍어 먹느라 눈코 뜰 새가 없을 즈음 사장의 남편이 돌아왔다. 스쿠버 다이버인 그가 들고 온 것은 괴물 로브스터(바닷가재의 호주식 발음) 여섯 마리다. 우리 사정을 대충 들은 그는 식사가 끝나기 전에 바닷가재 버터구이를 해주겠노라며 팔을 걷어 부쳤다. 전기 오븐의 자욱한 연기 속에서 바닷가재가 제 색깔을 달리하고 있었다. 다이버는 경남 산청에서 부부가 십 년 전 이리로 오게 된 내력을 박력 있게 들려주었다. 드시라며 뜯어주는 로브스터를 눈앞에 두니 마치 골목에서 공룡을 만난 기분이었다. 그 맛과 향은 도저히 필설로 꾸미지 못할 만큼 좋았다. 느지막이 퍼스로 돌아왔다. 셋 전부다 얼큰하게 취했다. 그 괴물 같은 해물탕 값이 비싸지 않은 게 신기했다. 호주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산청」에서 마치고 식당을 나설 때, 그날 대표가 두둑한 봉투를 여 사장에게 따로 건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업체 인수 금액도 예상보다 낮게 협상한 터라 기분이 몹시 좋았나 보았다.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기온이 영하 14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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