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자, 죽을병도 아니고 이왕 깼으니 이 술 맛이나 한 번 봅시다.
위스키, 글렌 피딕 / 정건우
91년,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과장 진급을 하였다. 플랜트 사업부 품질관리 과장이다. 당시는 포스코가 확장 일로에 있었기 때문에 설비 증설 공사가 한창일 때였다. 환경 설비를 독점 공급하다시피 하던 회사는 당연히 일이 많았고, 엄격한 품질 관리를 요구하던 발주사의 요청에 기민하게 대응하여 Q.C 전담 부서를 신설, 초대 책임을 내게 맡긴 것이다. 소속도 대표이사 회장 직속이라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부여받으며 제작 관련 부서와 협력사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생산 과장 5명과 10여 개 협력사가 제작한 제품을 Q.C 요원 7명이 책임지고 검사하느라 그야말로 불철주야로 바빠서 눈코 뜰 시간조차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거의 매일, 생산 부서와 협력사 간부들과의 불량품 관련 대책 회의로 실랑이가 끊이지 않았다.
좌충우돌하는 북새통이 한 달쯤 지났을까?. 조용한 미소가 일품인 멋쟁이로 소문난 협력사 Y 사장(별명, 조미사)이 점심을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요즘이야 회사마다 윤리경영이 일반화되어 있어 업체 간 접대 및 금품 수수 행위 금지 같은 부패방지 조치가 엄정하게 시행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개념조차 정립되지 않던 시절이라 협력사 직원과의 식사 정도는 다반사로 행해지던 때였다. 나는 담당 대리 2명을 동석시켜 소위 품질 민원에 대비하며 식사 자리에 참석하였다. 조미사는 품질 민원 등 회사 업무와 관련한 일체의 언급 없이 얼마 전 지인들과 같이 다녀왔다는 스코틀랜드 방문 소감을 매우 흥미롭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점잖은 목소리와 명확한 전달력으로 묘사해 내는 스코틀랜드의 풍광이 조미사 머리 뒤편에 비칠 만큼 실감 나는 그의 이야기에 우리는 넋이 빠질 지경이었다.
“글렌 피딕이라는 싱글 몰트 위스킨데, 향이 좋으니 한 번 마셔보시오. 수량이 딸려 한 병 밖에 못 구했소”
식당 밖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던 조미사는 내게 글렌 피딕을, 대리들에겐 시바스 리갈을 한 병씩 선물하는 것이었다. 좋아 죽는 대리들을 따돌리고 그는 낮은 소리로 “이거 스코틀랜드 현지에서도 어렵게 구했고, 이 모델은 국내에서 구경하기도 힘들다”며 “가격은 알려고 하지 마시오”라며 눈빛에 힘을 주며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원통으로 정밀하게 만든 검은색 케이스 안에, 멋있는 뿔의 사슴이 그려진 삼각형 술병의 첫인상은 근사하였다. 그러나 주량이 소주 반 잔인 나에겐 별 쓸모없는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알코올분해효소 즉, 아세트알데하이드 분해 요소가 정상인의 삼분지 일 밖에 안 돼 소주 반 잔에도 대취하는 몸이니 오죽하겠는가 마는, 조미사의 정성에 감격해하는 표정을 어색하게 지으며 그 원통을 들고 퇴근하였다.
내겐 손위로 두 처남과 동서, 손아래 동서가 있다. 네 사람 모두 한 술 하는 주당들이다. 명절 때, 그러니까 설과 추석 때 주당들은 어김없이 술판을 벌이고 유쾌하게 노는 것으로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로 유명했다. 질펀하게 술판을 벌여도 뒤끝이 깔끔하여 절대 큰소리가 나지 않는 술매너가 일품인 진짜 주당들이었기 때문이다. 처삼촌이 한 분 계시는 관계로 어려워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으나, 주당들을 관찰한 결과 음주를 제대로 배운 선량이라는 내 결론이다. 나는 비록 술은 못하지만 거나한 술판의 분위기를 몹시 좋아하여 양주 공급을 거의 도맡다시피 하였다. 이른바 고급 주류 공급책이었던 셈이다. 그래봤자 선물로 들어오는 브랜디, 보드카, 테킬라 등 저가 양주가 대부분이었지만 소주보다는 월등한 맛과 향에 주당들은 매우 만족해하며 즐겼다. 양주로 인해서 처가의 명절은 늘 유쾌하고 복닥 복닥 하였다.
그해 추석, 나는 글렌 피딕을 가지고 처가에 갔다. 늘 마시던 종류가 아닌 처음 보는 희한한 물건이 공급되자 주당들이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나는 조미사가 말한 내용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토해 내었다. 그제야 주당들은 글렌 피딕의 범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내일 아침 삼촌을 모시고 개봉하자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술판은 작은 처남이 옛날에 구해 놨다는 브랜디로 시끌벅적하게 벌여지고 다들 기분 좋게 취해 늦은 잠을 청했다. 새벽 한 시쯤 되었을까?. 그 큰방에 처남, 사위 내외들이 뒤죽박죽 섞여 자는 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나며 “아이고”하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모두 놀라 깨서 불을 켜고 확인해 보니 큰 동서가 코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쩔쩔매고 있는 것이었다. 방바닥에 글렌 피딕 술병이 나뒹굴어 있었다.
처남의 응급조치로 코피는 멎었으나 콧뼈가 함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러진 것 같단다. 새벽이라 병원에 가지도 못하겠고, 통증은 참을만하다고 하니 안심이 되자 큰 처남이 웬일이냐며 동서에게 다그쳐 물었다. 진짜 주당인 큰 동서는 글렌 피딕의 범상치 않음을 단박에 꿰뚫어 봤단다. 그래서 술 취한 핑계를 대고 먼저 맛이나 보자고 선반 위를 더듬다가 넘어지며 농짝 모서리에 부딪혔는지 술병 케이스에 찍혔는지 이리됐다는 시말이다. 모두들 술이 덜 깨어 퀭한 눈빛으로 이 상태를 어이없어했다.
“자, 자, 죽을병도 아니고 이왕 깼으니 이 술 맛이나 한 번 봅시다. 삼촌 거 조금 남기고”
콧등이 깨진 당사자가 이러며 나서자 주당들이 할 수 없다며 기다렸다는 듯이 술판을 후다닥 다시 벌였다. 향이 장난 아니라며, 이런 명주는 얼음과 안주 없이 음미하듯 마셔야 한다며, 근사한 솜씨로 동서가 먼저 잔을 비웠다. 새벽 두 시에 퍼지는 바닐라 꽃 향인지 서양배 향인지 모를 싱글 몰트 위스키의 끝판왕 글렌 피딕의 향기는, 술 모르는 내 코에도 천하일품이었다. 코 주위는 물론 얼굴까지 몰라보게 퉁퉁 부은 동서는 아침 식사도 거른 채 병원에 간다며 나갔다. 글렌 피딕 빈 병과 케이스도 야무지게 챙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