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롱 커피 좋아”라며 웃던 굽타가 보고 싶다.
한국산 믹스커피 중독자 / 정건우
아미트 굽타는 인도계 미국인이다. 그가 언제 미국 국적을 취득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스탠퍼드 대학 졸업 전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우리 회사를 인수한 미국계 사모펀드의 대표 투자자 2인 중 1명인 오십 줄의 실질적 오너다. 연간 약 15조 원 정도의 자금을 운용한단다. 사모펀드사 경영 기법상 머지않은 장래에 그와 우리는 결별해야만 한다. 회사의 가치를 제고시킨 후 매각하여 투자 차익을 노리는 것이 그들의 수익 창출 방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사의 임원인 나와 그와의 사이에는 우호적인 적대 세력과의 일시적 동맹관계라는 묘한 기류가 흐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미트 굽타는 늘 유쾌하였고, 십수 조원을 주무르는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검소한 모습과, 소탈한 성격까지 갖춘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다.
굽타는 한국 대표를 선발하여 회사에 상주시켰고, 한 달에 한 번 꼴로 내사하였다. 환경 관련 해외 인수 대상 업체의 기술적 역량 평가를 주로 내게 의뢰하는 편이라, 나는 그와 자주 대면하곤 하였다. 164센티의 비교적 단신에 마하트마 간디를 거의 그대로 빼박은 그는, 항상 제 상반신만큼 빵빵한 투미 백팩을 메고 다녔다. 1년에 300일을 해외에 체류한다는 그였으니 챙길 것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은 하였으나, 볼 때마다 불룩한 배낭 속이 몹시도 궁금하였다. 골드만 삭스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도 팽개쳤다는 그의 배낭에는 과연 무엇이 저리도 가득한 것인가?. 궁금증이 갈수록 커질 무렵 그와 한국 대표와 함께 인도 뭄바이로 첫 출장을 갔다. 인도 10 위급 철강회사에 우리 회사의 환경설비를 대규모로 공급하는 계약 전 중요 회의였다.
회사 연 매출 규모의 30%에 육박하는 볼륨의 계약 건이었고, 첫 인도 진출이라는 기념비적인 상징성이 있어 대표와 나는 잔뜩 긴장하였으나, 굽타는 도무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었다. 포스코에서 수십 년간 검증된 설비이므로 기술력에 가타부타 따지지 말자는 논조로 시종일관 거침이 없었다. 굽타의 이 바닥 금융 영향력을 익히 알고 있는 듯, 인도 업체 관계자들도 묵묵히 경청하는 분위기였고, 몇몇이 우리 설비의 운용상 특징을 물어 올 뿐이었다. 나와 대표는 긴장하여 500CC 잔을 가득 채운 인도 특유의 우유 거품 커피를 진작에 모두 마셨지만, 굽타는 입도 대지 않는 것이었다. 다소 지루하고 긴장되었던 회의가 휴식을 위해 잠시 중단되었다. 굽타는 예의 그 빵빵한 배낭을 들고 휴게실로 갔고 나와 대표는 그를 따랐다.
휴게실에서 굽타가 배낭의 지퍼를 당겼을 때, 내 눈에 가득하게 담기는 것은 이른바 붉은 믹스커피 대롱들이었다. 굽타는 유쾌하게 웃으며 대롱 한 개를 집어 들고는, 한쪽에서 플라스틱 컵을 꺼내 커피를 쏟고, 정수기의 온수를 받아 뜯은 대롱으로 휘휘 젓어 마시는 것이었다.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며 그가 웃는데 꼭 어린아이 같았다. 계약이고 나발이고 지금은 그래 이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저 순박한 미소에 나는 그만 녹아내리고 말았다. 상상도 못 했던 물건이 배낭에 가득한 것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기본 속옷과 노트북, 기타 전자기기 몇 개, 노트 몇 권 외에는 구석구석이 거의 다 믹스커피다. 종이컵은 비닐포장 채로 한쪽 구석에 모셔져 있었고, 주로 플라스틱 컵을 씻어 쓴다고 했다. 대롱이 어림잡아 300개는 너끈히 넘어 보였다.
굽타가 한국산 커피믹스에 미치기 시작한 것은 십 년 전이라 했다. 맥스웰 커피믹스에 완전히 정신을 판 굽타는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맥스웰 이외의 커피는 쳐다도 안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도 이 커피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설탕을 조절하여 마시며, 하루 다섯 잔 이상은 가급적 마시지 않노라고 했다. 다섯 잔도 많다고 했더니 병원 검진 결과 아무 이상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에 올 때마다 맥스웰을 챙기는 이유는, 해외에서 구입하기가 어렵고, 또 배낭에 대롱이 부족하면 왠지 불안해진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굽타가 이 정도로 국산 믹스커피 중독자인 줄은 몰랐다며 대표도 놀라는 눈치였다. 메기 매운탕을 매우 좋아하는 굽타는 후식으로 꼭 맥스웰 믹스커피를 요구하였으나, 대부분 식당에 비치된 것이 맥심 종류라 결국 그의 주머니를 뒤지게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뜨거운 물만 있으면 되는 간편함과, 물의 양만 조절하면 되는 일관된 맛의 믿음성과, 신뢰성에 비해 엄청나게 메리트 있는 가격 경쟁력과, 시공간과 계절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범용성과, 피로 해소와 집중력을 실제로 선사하는 에너지와, Social Coffee Time을 통해 함께 나눌 수 있는 즐거움을 주는 매력이 맥스웰 믹스커피의 특장이라고 굽타는 설파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한 가지의 매우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한국 고유의 맛과 향이며, 우연인지 팔연인지 자신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외국 것은 쳐다도 안 본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굽타는 어지간히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었다. 예상보다 훨씬 늦은 9년 후 굽타는 회사를 떠났다. “한국 대롱 커피 좋아”라며 웃던 굽타가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