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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고교 밴드에 올렸던 글

by 정건우

꼰대 / 정건우

- 고교 밴드에 올렸던 글


이기회 사장은 나에게 "이젠 마누라 말 좀 들어라"라고 훈수한다. 말인즉, 내가 신줏단지처럼 붙들고 사는 어떤 신념이나 관습, 버릇, 고집 등 일종의 심리적 강박에서 이제 벗어나라는 얘기로 들린다. 우리 나이가 꼰대 소리를 들을 때쯤이니, 거기에 꼽사리 끼지 말자는 뜻 같다. 꼰대가 꼰대에게 토하는 일갈일 터이다. 그렇다고 아내의 지혜와 경험, 세계 운영의 노하우를 이젠 존중하고 눈여겨 귀 기울이라는 얘기로 들리진 않는다. 어찌 보면 이젠 좀 단순해지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이번 내가 중환자실 입원하게 된 패혈증 난리통을 곱씹어 봤을 때, 날 살린 것은 아내의 눈물이었다는 결론이다. 생각을 추슬러 보면, "마누라 말 좀 들어라"라는 이 사장의 일갈에 내가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여 살 수 있었다는 얘기다. 약국에서 오줌소태 방광 약 사서 대충 먹고 며칠 견디다 오한이 하루에 두 번씩 왔을 때, 아내는 나의 아주 낯선 표정에서 죽음을 언뜻 본 것이었다. 어머니가 식물인간이 되기 직전에 보이던 병증이 내 얼굴에 청천벽력으로 현상되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며 큰 소릴 냈고, 약사 말대로 한 사흘 약 먹으니 괜찮아지는 것 같다며 일부러 샤워까지 했었다. 그날 오후 세 시쯤 갑자기 또 오한이 왔을 때, 아내는 눈물로 호소하는 것이었다. 눈물이라니, 이런 낯섦은 결혼 후 처음이다. 제발 병원에 가자고 아내가 우는 거. 나는 제기랄 투덜대며 귀찮게 옷을 입었고, 그새 들이닥친 119 구급대원에겐 별것 아니니 소란 떨지 말자고 당부까지 했으나, "아버님, 체온이 42돕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통제합니다" 단호한 구급 대원 옆에서 아내가 오열했었다. 그래도 난 마실 나가듯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가망 없으니 임종 준비하라는 1차 병원 초진 의사 말에, 실성한 아내가 내 전화 속 지인들에게 사발통문을 날렸던 모양이다. 의료대란으로 병원이 막혀 남편이 죽게 생겼으니 무슨 방법이 없겠느냐고 호소했다고 하더라. 하루만 늦었어도 나는 의식을 거의 잃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2차 종합병원 중환자실 진료 부장 브리핑에서도 난, "심전도 체크 중에도 국민교육헌장을 외울 수 있었는데?"라며 항변했었다. 의사가 한심하다는 듯이 웃더라. 제발 이 바이탈 수치 좀 보라며 말이다. 목숨과 자존심을 등치 시키는 일부 꼰대의 전형적인 고질 증세라고 비꼬는 듯했다.



마누라 말을 들으라는 것. 이 말은 남편의 낯선 일상 반응을 포착한 아내의 촉에 따지지 말고 기꺼이 응대하라는 말이다. 육십 넘게 끌고 온 진부한 내 신념, 고집, 버릇, 관습을 비집고 나온 것은 이른바 보편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본연의 표정 같은 것 말이다. 대개 우리는 그 보편성에 웃고, 울고, 감동하고, 입 다물고, 일어서고, 분노하고, 이해한다. 그 보편성은 일종의 단순함에서 기인할 터이다. 덕지덕지 군살이 박히지 않는 본연의 모습 말이다. 쉽고 빠르고 명쾌한 본능 같은 것일 거다. 내 갈등의 표정에서 발현하는 그 보편의 갈망을 캐치한 아내의 촉은, 삼십 년 넘게 나와 동숙한 경험을 토대로 감득한 것이라 실로 예리하고 정확할 것이다. 그 엄청나게 낯선 내 낯빛에서 아내는 이제 제발 내 말 좀 들으라며, 눈물이라는 온화한 폭력으로 호소했던 것 같다.



처서가 되면 공기가 바뀐다.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이른바 절기가 교체된다. 그런데 그런 절기 교대식이 협의와 타협 속에서 원만하고 질서 정연한 순리의 흐름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계절이 바뀌는 것은, 닥친 바람이 뭉개는 바람의 복숭아뼈를 사정없이 후려갈기며 아파트 동 간 거리를 게릴라처럼 점령하듯이 바뀌는 것이다. 사지가 오그라드는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계절은 바뀌고, 그때 온통 거리는 아수라장이었던 것이다. 온화하고, 무덥고, 서늘하고, 추운 기운의 바탕은 소리 없는 폭력이다. 그래야만 어김없이 계절이 오가고, 인간이 살고 죽는 현상이 이해된다. 이제 내 말 좀 들으라는, 자비로운 폭력에 대한 즉각 반응에 다름 아니다.



자연이나 인간사나 마찬가지 같다는 생각이다. 우리 나이쯤에서 생의 변곡점의 방향성은 실로 단순하고 유치하고 가벼운 쪽을 지향해야 할 것 같다. 예순을 넘어 이젠 각질처럼 까끌까끌한 꼰대의 거스러미를 다듬질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박해졌다. 아내와 아들과 며느리를 마주할 때마다, 과부하의 하중으로 휘청이던 내 무릎이 안쓰러워졌었다. 쓸데없는 고민이나 근심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한없이 자유로웠다. 이건 원망이나 실망, 이율배반과 틀어진 도덕이나 윤리 따위의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따질 것이 결코 아니다. 내 속의 고리타분한 꼰대의 거스러미가 쓸데없이 빳빳했던 것이다. 어디에도 쓰임이 없는 사족 같은 것, 스스로 하루하루 발라내고 있는 요즘이다. 한없이 단순하고 유치하게 살자고 발버둥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아님으로. 또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이젠 상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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