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by 이홍

오늘 안에 대출 관련 전화가 온다고 하기에 내내 기다렸건만, 이런 전화는 꼭 휴게소를 지나고 다시 버스에 타면 걸려온다. 기다렸던 전화인 만큼 벨이 세 번 이상 울리기 전에 받았는데, 역시나 상대방은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는다.

그렇겠지, 자기 일이 아니니까. 남이 빚을 지고 말고 상관 없으니까. 게다가 방침이 그렇다는 소리만 하면 일부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 일부가 아니었다. 당장 눈앞에 떨어진 빚을 갚아야 하는데, 상담원은 매번 이런 조건 저런 조건 다 따져가며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

처음이나 아쉽게 전화를 끊었지, 그것도 열 번 되고, 스무 번 되니까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저기요. 그렇게 다 안 된다고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예요? 그냥 이대로 빚더미에 깔려 죽으라는 거야, 뭐야! 이러다가 내가 자살이라도 하면 그쪽이 장례 치러줄 거야?”

미윤은 대출이 되지 않는 게 상담원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면서도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휴게소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먼 길을 가야 하는 상황에서 버스 내 몇 없는 사람들은 거의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뱃속부터 울컥 올라오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스마트폰 너머로 상담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하려는 듯 숨을 흡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는데, 미윤은 그 틈을 참지 못하고 그동안 억눌러왔던 심정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도 이렇게 사방으로 대출하겠다고 알아보고 다니는 거 원하지 않았어. 잘 될 거라고 생각해서 장사하는 거지, 안 될 거라고 생각해서 장사 시작하는 사람도 있어요? 온갖 고생 다 해가며 모은 돈 싹 날린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매번 이거 때문에 안 된다, 저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면 나 같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예요? 너도 내가 만만하지? 나 같은 거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다 안 된다고 하는 거 아니야!”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었다. 최대한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 맨 뒷좌석을 선택했는데, 그 선택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를 힐끔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바로 내 앞자리에 앉은 여자는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안 그래도 냉랭하게 생긴 얼굴은 금방이라도 서리가 내려앉을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미윤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뭘 봐요!”

“거 조용히 좀 합시다. 버스에서 시끄럽게 통화하지 마세요, 아줌마!”

대답은 멀리서 들려왔다. 운전하고 있던 버스 기사가 버럭 짜증을 내자,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얼마 없는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전부 일행이 없었기에 그들은 혼잣말을 가장해서 나 들으라는 듯 말했다.

그 사이 스마트폰 너머로 안내 음성이 들려왔다. 상담원에게 지나치게 언성을 높이거나 욕을 하면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고.

입을 앙 다물었다. 그래, 숨 쉬는 소리도 듣기 싫은 거지? 아주 숨 참다가 죽어버려야지. 성질스럽게 전화 종료 버튼을 마구 눌렀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휙 돌려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나무들이 형태 없이 뭉개진다. 이렇다 할 특징 하나 눈에 띄지 않은 채 마구 번진 초록빛이 꼭 사라져가는 내 돈을 표현하는 듯하다.


처음부터 회사를 관두거나 이직할 생각한 건 아니다. 남의 돈 받기 위해 일한다는 게 기분 나쁘고, 짜증나고,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적도 많았지만, 그건 세상 모든 직장인이라면 그렇게 사는 거니까.

미윤은 최대한 한 곳에서 머물면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여기저기 옮길 수 있고, 그럴 실력도 갖추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서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원래 그랬다.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게 편했고, 뭐라도 하나 오래 하면 될 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이미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가 있는데, 뭐하러 다른 자리를 알아보겠다고 고생한단 말인가.

요즘 세상에 평생 직장이 어디 있느냐며 일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이직 생각이나 하는 젊은이들이 한심했다. 자고로 일이라는 건 그것이 몸에 익숙해지도록 진득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처음 하는 일이면 실수하기도 하고, 혼나기도 하면서 배워가는 게 맞지. 그런데 요즘 것들은 조금만 혼이 나도 다음 날 말없이 회사를 안 나오곤 한다.

나는 그 행동을 자기 복 걷어차는 행동이라고 일컬었다. 너무 멍청한데, 듣는 귀는 꽉꽉 막혀서 어른들이 해주는 조언을 마음에 새기지도 못하는 것들. 티브이나 뉴스에서는 점잖게 MZ 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자기 고집 센 요즘 애들이었다.

슬슬 자리를 잡았으니, 본격적으로 업무에 참여해야 하는 신입 직원 하나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다음 날 아침까지 비어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 후 퇴사하는 직원은 애가 탔다. 발만 동동 구르지 않았지, 사색이 된 얼굴 위로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마지막 날 급하게 나가고 싶지 않다며 천천히 정리하던 짐 속에서 물건을 하나씩 다시 꺼낼 때마다 일그러지는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부터 내내 연락을 취해봤지만, 전화를 받기는커녕 아예 스마트폰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음성을 듣고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연차가 있다 보니 주변은 대부분 후배들 뿐이었다.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는 게 눈에 보이는데, 일주일 후 퇴사하는 직원, 즉 미윤의 하나 남은 동기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무리 답답하다고 한들 후배들 앉혀놓고 이제 신입사원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람을 욕할 순 없는 일이다. 상사가 있긴 하지만, 얼마 전 다른 회사에서 더 높은 자리를 권유 받으며 옮겨온 사람이라 쉽게 마음을 터놓고 떠들기란 어려웠다.

종이컵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찬물을 받아 마신 그는 눈짓으로 나를 불렀다.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 상사는 적당히 모르는 척을 해줬다.

그날 미윤은 온갖 징징거림을 다 들어줘야 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일정이 꼬일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회사는 관두면 그만이고, 그 전까지 해야 할 일은 다 해놨으니 어쨌거나 자기 책임은 없는 거라며 여러 번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실 자기가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와서 가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었단다.

솔직히 그 거짓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이 바닥이 얼마나 좁은데 다른 회사로 간다고 하면 알음알음 얘기가 흘러 들어오고도 남았을 상황인데, 이렇게 조용한 걸.

하지만 미윤은 그의 거짓말을 모른 척하기로 했다. 거짓말을 했다면 이유가 있었겠지. 그리고 이렇게 어설프게 숨긴 걸 보면 그의 속마음엔 “정말 회사 옮기시는 건가요?” 물어볼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거 아니었어?”

그날은 하도 안쓰러워서 맞장구 좀 친 거였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과 일했는데 요즘처럼 답답한 애들은 처음이라고 소리치다가 결국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걸 보니, 대충 받아주면 아주 귀찮아질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이기도 했다.

대충 뱉어낸 한 마디에 그는 거의 타지 않은 장초를 재떨이에 던져버리고 종알거리기 시작했다. 요약해보자면 이랬다.

다른 회사에서 제안이 들어온 건 맞다, 그리고 처음엔 거기로 옮기려고 생각한 것도 맞다, 하지만 나는 지쳐있었다(여기서 코웃음을 칠 뻔했다. 우리 나이까지 일하면서 안 지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솔직히 이 회사에 다니면서도 다른 일을 해볼까 고민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에겐 새로운 게 필요했다... 주절주절.

미윤은 그 사이 다 피운 담배를 버리고,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칙칙거리는 일회용 라이터는 불씨만 조금 튀기고 말았다. 기름이 똑 떨어진 거다. 쓰레기통을 향해 짜증스럽게 라이터를 던지는데, 옆에서 자기 이야기 하느라 정신없던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서 나, 이번에 사장 해보려고.”

“어어... 어?”

“나도 내 가게를 가지고 싶어.”

그 순간만큼은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술에 걸친 새 담배가 허공을 향해 툭 날아갔다. 노골적인 비웃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내 행동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런 반응을 봤다는 사실에 눈을 더욱 빛내는 듯했다.

“너도 어이없다고 생각하지? 나도 그래. 하지만 두고 봐, 나 반드시 성공할 거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라면 왜 그런 무모한 도전을 하느냐, 차라리 좋은 회사 다니면서 정년퇴직까지 기다리는 게 어떠냐며 충고했을 거다. 하지만 회사를 나가면, 게다가 이 좁은 판을 뜬다고 하면 앞으로 볼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내가 뭐하러.

괜히 버린 담배만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페를 열고 싶다며 자신이 세운 계획을 조잘조잘 말했다. 미윤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계속 그럴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권유받고 우리 회사로 들어와 어느 정도 적응한 상사는 이것저것 참견하기 시작했다. 그냥 참견만 하면 모르겠는데, 그는 자기가 일하는 스타일을 직원들이 맞추지 않으면 맞출 때까지 지적하는 사람이었다.

어디서 저런 걸 데려왔지? 그가 말하는 대로 하면 업무 효율이 좋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이 일할 땐 효율만 따져가며 하는 게 아니다. 빙빙 돌아가는 식으로 일한다, 거기서 바로 이렇게 하면 될 걸 왜 그렇게 하냐, 이런 식으로 해서 일을 언제 끝내냐 등등.

듣기 싫은 잔소리가 줄을 이었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다들 나름의 방식이 있는 거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다. 그러면 분명 싸움이 일어나겠지. 무조건 자신이 하는 방법이 맞고, 너네는 다 틀렸다고 말할 때마다 옛날 어느 예능 프로그램처럼 머리 위로 쟁반이 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한 귀로 듣고 흘려도 될 일이지만, 저 사람은 끝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가만 놔두면 마치 자기 말에 다 동의해서 입 다물었다고 착각할 듯한 사람. 언젠가는 꼭 한 마디 해야 했고, 그 ‘언젠가’는 늦지 않는 게 좋다.

다른 직원들은 시달리다 못해 상사의 말대로 하는 척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감추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뭐가 제대로 돌아가겠냐고.

이번에도 또 지적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똑 떨어진 커피도 내리고, 물도 텀블러에 담을 생각이었다.

탕비실에 들어가는 순간 울린 전화가 내 인생을 이렇게 바꿀 줄 알았다면, 절대 받지 않았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