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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입은 이미 언박싱 중입니다

입은 실수해도, 마음은 진심이다.

by Susie 방글이


남편은 종종 내 입을 못 믿는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를 의심한다.


"이번에도 흘렸지?"


그 말에 나는 시치미를 뚝 뗀다.

하지만 이미 내 입은 반쯤 열려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문제다.

딸의 대학 졸업 선물을 준비하면서부터 입이 근질근질했다.

내 입은 이미 '언박싱 모드'였다.

그 비밀이 세상 밖으로 새어 나오는 건 시간문제였다.

결국 어느 날, 나는 못 참았다.


"진짜 대박 선물 있다~"

그 한마디로 모든 게 끝났다.


남편은 틈만 나면 웃으며 말한다.

"또 흘렸네, 또 흘렸어."


근데 솔직히, 비밀이란 게 꼭 숨기라고 있는 걸까?

내겐 자랑하라고 있는 것 같다.

내 입은 늘 작은 콩주머니를 달고 다닌다.

누가 "요즘 뭐 재미있는 일 없어요?"라고 물으면, 그 콩주머니가 달랑달랑 흔들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툭. 콩 하나가 굴러 나온다.


영어에는 spill the beans라는 표현이 있다. 한국말로 어떻게 해석될까?


직역하면 '콩을 쏟다'지만, 실제 의미는 '비밀을 흘리다' 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투표할 때 항아리에 흰 콩(찬성)과 검은콩(반대)을 넣어 표를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실수로 항아리를 엎질러 콩이 쏟아지면서, 투표 결과가 미리 드러나 버렸다.
이때부터 '콩을 쏟다'는 '비밀을 누설하다'라는 뜻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spill the beans'는 고대판 '입방정'인 셈이다.


비밀이든 콩이든, 일단 쏟고 나면 주워 담기엔 힘들죠.


한국에서는 "입이 싸다", "입이 가볍다"라고 하지만

영어 표현은 좀 더 장난스럽다.

"Spill the beans!" 하면 꾸짖는 말보단 웃음이 섞인다.


남편이 내게 그렇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진심으로 화내기보다,

"여보, 또 흘렸지?" 하며 피식 웃는 그 표정.

나는 그 표정이 재미있다.

들킬 걸 알면서도 괜히 또 흘리고 싶어진다.


글을 쓰다 보니 문득 'big mouth'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말이 많고, 흘릴 땐 시원하게 흘리는 사람.

그게 꼭 나 같기도 하다.


그런데 웃긴 건 - 나, 사실 입이 무겁다.

영어로는 tight-lipped라고 한다.

입을 꽉 다문 모습 그대로, 비밀을 잘 지키는 사람.

남의 얘기는 절대 흘리지 않는다.

흘리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한 비밀 정도일 뿐이다.



영어 해석 Tip


Spill the beans – 비밀을 흘리다
예: Who spilled the beans about the surprise gift?
  "그 깜짝 선물 누가 흘린 거야?"


한국어식으로는?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 "비밀을 말하다."

장난스럽게 말할 때: "입방정 떨다!"

피해야 할 번역: "콩을 쏟다."(직역은 금물 )




Big mouth – 말이 많은 사람, 비밀을 못 지키는 사람
예: You’re such a big mouth!
  "너 정말 입이 싸구나!"


한국어식으로는?


"입이 가볍다."

"입이 방정이다."




Tight-lipped / My lips are sealed – 입이 무거운 사람, 비밀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

예 1: She stayed tight-lipped about the plan.
  "그녀는 그 계획에 대해 입을 꾹 다물었다."

예 2: Don’t worry. My lips are sealed.
  "걱정 마. 내 입은 봉인됐어(비밀 지킬게)."


한국어식으로는?


"입이 무겁다."

"비밀 철저히 지키다."

"입 꾹 다물다."




어쩌면 나는 입이 무겁되, 마음이 가벼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말이 많은 건, 결국 마음속 온기를 나누고 싶어서니까.

비밀을 지켜도 사랑, 흘려도 사랑.

그게 나다운 방식이다.


오늘은 콩 대신, 커피콩을 쏟았습니다. 입은 무겁지만, 마음은 늘 이렇게 향기로 흘러나옵니다.


입은 닫혀 있어도, 마음은 늘 향기로 새어 나온다. 아마 그것이 내가 세상과 이야기하는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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