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탄다 탄다 드디어 탄다

가을을

by Susie 방글이




온거리가 단풍으로 물든 모습을 보며,

편지들이 가득한 상자를 꺼냈다.


오래된 손글씨 사이로, 그 시절의 공기와 웃음소리가 되살아났다.

편지를 덮자, 이번엔 낡은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사람들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묘하게 흔들렸다.

그때부터다. 오래 닫아두었던 이름들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한 건.


나는 봄보다 가을을 탄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사실 계절에 성별이 어딨 냐만은, 확실히 가을엔 뭔가 센치해지는 구석이 있다.


봄은 설렘에 허둥대고,

여름은 뜨거움에 헉헉대고,

겨울은 이불속에 숨어버리는데—

가을만은, 나를 꺼내어 생각하게 한다.


햇살은 부드럽고, 공기는 선선한데

그 온도의 미묘한 차이가 마음 한구석을 건드린다.


물든 가을, 잠시 나도 그 색 안에 서 있었다.
호수 위로 흩어지는 시간, 그 끝에 서 있는 나.
하늘 아래 가장 예쁜 빨강. 단풍 프레임 속 가을 한 컷.


"가을 탄다."를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까?


이 말을 영어로 옮기려면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Sentimental'이나 'melancholy'가 떠오르지만,

그 속엔 ‘탄다’의 따뜻한 여운이 빠져 있다.

‘가을을 탄다’는 단순히 우울하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이 살짝 기울고,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적 현상이다.

햇살은 여전히 포근한데, 그 안에 스며든 서늘함이 마음을 흔드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탄다’.


'Sentimental'에는 감정의 부드러움이 있다.

"I get sentimental in the fall."

혼잣말로 이렇게 말해봤지만, 어딘가 부족했다.


'Sentimental'에는 감정이 있지만,

'탄다'에는 온도와 움직임이 있다.

마치 감정의 파도를 타듯, 계절에 몸을 맡기는 일.


'Melancholy'는 감정의 깊이를 보여준다.

"There’s a melancholy beauty in autumn."

아름다움 속에 스민 쓸쓸함이다.


그리고 "I get moody in the fall."

Moody는 sentimental보다 조금 더 솔직하고 날것의 감정이다.

햇살 한 줄기에도 괜히 마음이 흔들리고,

사소한 일에도 이유 없이 서운해지는—

그런 감정의 온도 변화 말이다.


영어에는 여러 단어가 있지만,

그 어떤 것도 '탄다'의 온도를 품진 못한다.

감정이 바람을 타듯, 우리는 계절을 탄다.


결국 '가을 탄다'는 한국식 정서의 압축파일이다.

슬픔 40%, 추억 30%, 여운 20%,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10%의 허무함.


압축을 풀면, 용량이 꽤 크다.


창밖 나무들이 조금씩 색을 바꾸고 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가을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가을은 짧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그래서 더 타게 되는지도 모른다.



영어 표현 Tip


Sentimental: 감성적이고 따뜻한, 추억에 잠긴 상태


I get sentimental in the fall.

(가을만 되면 괜히 감성적으로 변해.)


Melancholy: 고요하게 우울한, 쓸쓸한 감정


There’s a melancholy beauty in autumn.

(가을엔 쓸쓸한 아름다움이 있다.)


Moody: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감정에 예민한 상태


I get moody in the fall.

(가을만 되면 괜히 마음이 출렁여.)



'가을 탄다'는 이 모든 감정에 온도와 움직임을 더한 표현이다.

언어로 번역하기보단, 가을 햇살 아래서 그냥 느껴야 하는 말이다.


가을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많지만,

"가을을 탄다'만큼, 가을을 타는 표현이 또 있을까?"


Sentimental.

Moody.

Melancholy.


그 모든 감정이 뒤섞여,

오늘도 우리는 조용히 —

가을을 탄다.


오늘 산책은 조금 느리게, 가을을 오래 걷기 위해. 강아지도, 나도, 괜히 마음이 잔잔해지는 날.


이렇게, 또 한 계절이 마음을 흔들고 지나간다.


관련 표현이나 더 알고 싶은 표현이 있으면 언제든 댓글로 질문해 주세요.

다음 회에서 또 만나요! See you in the next episode!


단풍잎처럼 알록달록 곱게 물든 밀푀유나베 한 냄비로 가을을 데워보는 건 어떨까요? 따뜻한 국물 한 숟갈에 가을이 살짝 스며듭니다.

keyword
수, 토 연재
이전 07화지금은 배터리 충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