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

회피의 기술, 설계의 관행

by LIFOJ

문제가 생겼다.
국민이 불편을 겪었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부처는 “해당 기관 소관이다”라고 말하고,
기관은 “지침대로 처리했다”고 말하며,
현장 담당자는 “윗선의 결정”이라고 말한다.

끝까지 올라가 보면
책임자는 사라지고
절차만 남아 있다.


책임은 없고, 매뉴얼만 있는 나라

한국 사회의 행정 시스템은
놀라울 만큼 ‘절차 중심’이다.
규정, 지침, 매뉴얼, 체크리스트.
모든 판단은 문서로 위임된다.

문제는,
문서가 사람을 대신한다는 점이다.

“매뉴얼대로 했습니다.”

“그 항목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에 따랐습니다.”

이 말들은 익숙하다.
그리고 무섭다.
왜냐하면 아무도 실질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왜 결정을 피하는가

많은 공무원들이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을 것이다.
그들은 무능한 게 아니다.
결정을 내리면, 책임도 따라오니까.

결정은 위험하다.
특히 그 결정이 '선례'로 남으면
다음 민원, 다음 문제의 기준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애매한 사안일수록 더 윗선으로 넘기고,
더 큰 사안일수록 규정에 의존하게 된다.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시스템은
이렇게 스스로를 방어한다.


민간도 따라 배운 ‘책임 회피’

이 문화는 이제 민간 영역에도 깊숙이 퍼졌다.

고객센터는 “그건 본사 결정입니다”라고 말하고,

본사는 “그건 현장 판단입니다”라고 한다.

시스템 오류가 발생해도
누구 하나 정확히 '왜 그랬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결국 고객은, 국민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책임 없음의 미로’ 안을 헤매게 된다.


책임지는 사람이 사라진 사회

한국 사회에는
'결정권자'는 있지만
'책임자'는 없는 경우가 많다.

정책이 실패해도
“그 당시에는 최선이었다”고 말하면 끝이다.
행정 착오가 발생해도
“해당 부서는 구조조정됐다”는 말로 정리된다.

그리고 모두는
다음 사안으로 넘어간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


책임이 없으면, 변화도 없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아무도
다음번을 개선할 동기를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제가 반복되고,

예산은 낭비되며,

국민은 피로해진다.

그러나 시스템은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시스템은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을 전제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볼 질문
“당신이 겪은 문제에는, 그 누구의 이름이 남아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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