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짐
세월은 속절없이 흐른다. 시원했던 김치는 혀가 꼬부라지도록 시큼해지고, 총명했던 한 사람의 눈동자도 흐려지게 만든다. 든든한 풍채의 외할아버지는 겨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게 변하셨다. 우리 할아버진 막둥이인 어머니를 무척 귀여워하셨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얻은 자식이라 분유를 먹여가면서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키우셨다더라. 고등학생 때인가, 어머니의 마른기침이 길게 이어졌을 때가 있었다.
"켈록켈록."
"엄마, 저랑 같이 병원 가요."
"혼자 가면 돼. 도통 시간이 안 나서 못 갈 뿐이야."
드디어 시간이 나 병원에 가기로 한 날, 할아버지께 전화가 왔다고 한다.
"예, 아버지."
"응, 나다. 바쁘니?"
"병원 가는 길이라 진료 끝나고 연락드릴게요."
"병원?"
할아버지는 한걸음에 우리 집까지 오셨다.
"아유 아버지. 집 앞 이비인후과 가는 건데요."
"아니다. 내 손 잡아!"
어머니는 두툼한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집 앞 이비인후과에 가는 길이지만,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성함이요?"
"저 말고 우리 아기요."
"어머."
든든함은 얼마 안 가 민망함으로 바뀌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아픈 할아버지를 모시고 오신 줄 알고, 할아버지 존함을 물어보신 거다. 진료를 받을 때에도 아까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어르신, 이쪽으로 누우세요."
"저예요.."
"예? 어르신을 모시고 오신 게 아니라 어르신이 따님을 모시고 오신 거예요?!"
"네.."
"순서가 뒤바뀌었네!"
하하하! 의사 선생님을 시작으로 파도타기처럼 웃음이 전염되었다. 간호사선생님, 할아버지, 어머니까지 네 명이 빵 터졌다더라.
"그런 일이 있었지 뭐니. 부끄러워 혼났어."
"푸하하하! 고등학생 딸이 있는 아기! 아이고 배야!"
이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할아버지는 그새 많이 야위셨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할아버지를 뵈러 간다. 집도 치워주고 반찬이나 제철과일을 사들고 가 냉장고를 채워주신다.
어머니께서 일이 바빠 이 주 동안 못 뵌 적이 있었다. 할아버지 동네를 지나쳐가는데 마음이 일렁일렁 이상하셨다지.
"아버지 잘 지내시려나. 보고 싶네."
"너무 걱정 마세요. 요양보호사님이 계시니 괜찮을 거예요."
언니와 나는 어머니가 좀 쉬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께서 할아버지를 가여워하는 것처럼 우린 어머니가 가여웠다. 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주말 아침이 밝자마자 할아버지 댁으로 향했다.
***
"아버지~"
서재로 간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구부정하게 앉아계신 할아버지를 발견하셨다.
"왜 그리 불편하게 앉아 계세요."
"왔니?"
"죽 쒀 왔는데 지금 잡수실래요?"
.
.
"아버지, 맛있어요?"
"으응~ 맛 좋네."
어머니는 생각하셨다. '나이가 든다는 건 참 서글퍼. 나이 드는 부모를 바라보는 건 더 서글프고.' 할아버지는 평소처럼 드실 뿐인데 왜 그리 가엽고 목이 메던지. 자꾸만 차오르는 눈물에 어머닌 자리를 일어나야만 했다.
"잘 드시니 다행이에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벌써~?"
"예.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네."
할아버지에게 우는 것을 들키기 싫어서였다.
***
시동을 걸고 출발하려는데, 방 한쪽에 기운 없이 웅크리고 계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 언제 이리 늙으셨나···."
어머닌 한참을 우셨다.
***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왁자지껄 시끄럽다.
"어으 셔!"
"뭔데 뭔데! 한 입만!"
"총각김치 썰어서 볶음밥 해 먹으려고 했더니."
"에잉, 난 또. 젤리인 줄."
"다녀오셨어요!"
"둘이서 뭐 하니?"
"배고파서 밥 먹으려고요."
"엄마, 김치가 너무 익었어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지났구나. 다 익으니 쓸쓸하네. 기다려봐. 무지짐 해 줄게."
'김치가 익어서 쓸쓸하단 게 무슨 의미지?'
어머니의 마음을 모른 상태로 우린 무지짐을 먹었다.
익어야 맛있는 요리, 무지짐을 해 먹자.
재료: 멸치, 익은 총각김치, 익은 배추김치, 다진 마늘, 청양고춧가루, 들기름, 깨
조리 방법
멸치 대가리와 똥을 제거해 준다.
멸치를 한 번 덖어준다.
씻은 총각김치와 배추김치를 냄비에 담는다.
물을 넉넉히 붓고 다진 마늘, 들기름, 청양고춧가루를 취향껏 뿌려준다.
무가 말랑해질 때까지 익혀준다.
물기가 많다면, 완전히 졸아들 때까지 익혀준다.
작은 팁
밥에 물을 말아먹으면 더욱 맛있다.
매운 걸 못 먹는다면 고춧가루 대신 간장에 조리자. 솔직히 간장 없이 들기름에만 지져도 맛있다.
연두를 넣으면 감칠맛을 확 끌어올릴 수 있다.
***
어머니는 아버지의 세월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꽃이 찰나에 펴서 아름다운 것처럼, 할아버지의 남은 여생도 꽃이 핀 순간처럼 소중하게 여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