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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사지 못한 게 아니라, 사지 않은 이유

선택의 무게와 후회 없는 판단

by 팩트만본다 Mar 2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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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 앞에서 멈춘 손


계약서 앞에서 손이 멈췄던 날이 있다.
은행 상담도 끝났고, 대출 승인도 이상 없었다.
종이 위에는 이름 세 글자를 쓸 자리만 남아 있었고,
펜은 손에 쥐어졌지만 이상하리만큼 무거웠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홀로 선 듯한 느낌이었다.


사무실 안의 소음은 점점 멀어졌고,
내 시야에는 오직 계약서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지금, 나는 왜 망설였을까.
숫자는 ‘지금이 기회’라 말하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말없이 그 손을 붙잡고 있었다.


서명을 앞둔 손끝에서 전해지던 묵직한 감각.
그것은 종이의 무게도, 펜의 무게도 아니었다.
그 순간 느껴진 건
삶을 결정하는 무게,
그리고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할 나 자신에 대한
책임과 두려움이었다.


이전에도 선택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와는 다른 깊이의 감정이었다.
이번 선택은 단순한 집 구매가 아니라,
나의 삶 전체를 재편할 첫 번째 단추 같았다.
그래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흐름 속에서 흔들리는 마음


며칠 후, 사람들은 물었다.
“왜 안 샀어?”
“그 타이밍 놓치면 다시 못 와.”


그 질문은 짧았지만, 마음을 흔들었다.
그들의 눈빛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했고,
마치 내가 이상한 선택을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맞는 말이긴 하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모두가 움직이는 시점에
혼자 멈춘 나를 바라보며,
나는 잘못된 길을 택한 건 아닐까 자문했다.


불안은 어느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뉴스는 매일 ‘거래량 반등’을 외쳤고,
커뮤니티는 “지금 안 사면 손해”라는 문구로 가득했다.
유튜브에선 “지금이 진짜 기회”라는
자극적인 분석 영상이 넘쳐났고,
그 소음 속에서 나의 생각은 점점 흐려졌다.


나만 움직이지 않은 듯한 고립감.
그 고요함은 불안으로 이어졌고,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대로 가면 뒤처질까?”
“정말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걸까?”


그 물음 끝에서,
나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남들이 말하는 기회는
과연 나에게도 기회일까?”





사지 못한 게 아니라, 사지 않은 이유


혼란 속에서도, 나는 결국 나에게 솔직해졌다.
사지 못한 게 아니다. 사지 않은 것이다.’


그 한 문장은 나의 마음을 정리해줬다.
모든 조건은 갖춰져 있었고,
누구나 사라고 했지만
내 안의 감각은 분명히 거부하고 있었다.


그 집에서의 나날들이 상상되지 않았고,
행복한 미래는 떠오르지 않았다.
숫자는 이득을 속삭였지만,
삶은 조용히 다른 이야기를 건넸다.


그 이야기는 구체적인 단어가 아닌,
막연한 불안과 낯섦, 그리고
삶의 온도 차이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 감각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선택의 무게를 감당하는 순간


계약서를 마주한 그 순간, 나는 두려웠다.
그 두려움은 단순한 망설임이 아니었다.
이 선택이 나의 미래 전체를 규정할까 봐,
그리고 그 미래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느끼는 본능적인 저항이었다.


종이 한 장 위의 서명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었다.
그 위에는 내 삶의 리듬과 방향,
앞으로의 시간들이 압축되어 있었다.


그 집에서 맞이할 아침과 저녁,
내가 감당해야 할 일상과 감정들.
그 모든 것을 상상해봤지만,
마음은 묘하게도 낯설고 차가웠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이 선택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할까?”
“아니면 단지 ‘옳다고 여겨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일 뿐일까?”


그 물음 끝에서, 나는 멈췄다.
멈춘다는 것은 도망이 아니었다.
그건 내가 나의 삶을 책임지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나를 위한 선택은,
때로는 하지 않음이라는 결단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남의 선택, 나의 속도


주변 사람들은 움직였다.
친구는 이미 계약을 마쳤고,
지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매물을 공유했다.
“이거 진짜 괜찮아.”
“지금 아니면 또 기회 못 잡아.”


그 말들은 때론 조언처럼 들렸고,
때론 나를 다그치는 듯한 압박처럼 느껴졌다.


SNS에는 계약을 마친 사람들의 사진과 글,
‘새로운 시작’, ‘드디어 내 집 마련’
그런 문구들이 넘쳐났다.


그걸 보며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마치 혼자 멈춰 선 사람처럼,
나만 흐름에서 떨어져 나간 느낌.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남의 속도가 내 속도일 수는 없다.
그들이 옳다고 말해도,
나의 기준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흐름보다 기준이,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했다.
나는 그 기준을 지키기로 했다.




후회보다 중요한 것


두 달 후, 시장은 예상과 달랐다.
가격은 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일부 지역은 하락세를 탔다.


사람들은 말한다.
“괜히 샀다.”
“지금 사면 손해였어.”


나는 그때 안도했다.
하지만 그 안도는 단순한 시장 흐름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내 선택에 후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았기에 잃지 않은 것이 있었고,
지킨 것은 돈이 아니라
내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확신했다.
후회 없는 선택이란
결과가 아닌 기준에서 온다는 것을.




삶은 타이밍이 아니라 기준으로 산다


그 후에도 기회는 계속 찾아왔다.
사람들은 또 말했다.
“이번엔 진짜 마지막 기회야.”
“지금 아니면 평생 기회 없어.”


그 말들은 여전히 강하게 다가왔지만,
나는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나는 웃으며 대답할 수 있었다.
지금이 아니어도, 나는 괜찮아.”


삶은 타이밍의 싸움이 아니다.
삶은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세상의 소음이 아니라,
내 내면에서 자라나는 감각이다.


그 기준은 하루아침에 생긴 게 아니었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흔들리며, 고민하며
나를 돌아보며 조금씩 쌓여온
삶의 나침반이었다.


나는 그 나침반을 따르기로 했다.




삶의 방향은 내가 정한다


시장은 오늘도 요동친다.
사람들은 여전히 서두르고,
새로운 정보를 좇는다.


그러나 나는 조급하지 않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움직임 없음이
나를 지켜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건 망설임이야.”
그러나 나는 안다.
그건 나의 속도야.”


삶은 남보다 빠르게 가는 것이 아니라,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흔들려도, 멈춰도
나의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
그 길 위에 나는 서 있고,
그 삶에 나는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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