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결국 내 게임을 시작하게 되었다

1부| 마흔에는 서울 자가에 정장 입고 일할 줄 알았다

by 영초이

마흔 이전에 내가 꾸준히 했던 유일한 취미는 게임이었다. 특히 많은 몬스터를 한 번에 쓸어버리는 사냥 게임을 좋아했다. 전략을 짜는 게임보다는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는 강렬한 쾌감에 끌렸다.


이런 게임들의 목표는 너무도 단순하다. 레벨을 올리고 더 강한 기술로 더 많은 몬스터를 잡는다. 그러나 문제는 좋은 장비를 얻는 과정이었다. 같은 몬스터를 수백 번 잡으며 운 좋게 아이템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반복 노동이 필수였다. 그럼에도 강해지기 위해서는 기꺼이 몇 시간씩 반복했다.


게임을 오래 하다 보니 아이템을 보는 눈이 생겼다. 어느 날 노점을 구경하다 꽤 좋아 보이는 아이템이 헐값에 올라온 것을 발견했다. 이걸 이 가격에? 별 생각 없이 100만 원에 산 그 아이템을, 얼마 지나지 않아 필요한 사람에게 1억 원에 팔았다. 현금이면 좋겠지만 게임 머니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게 돈이 되네? 그리고 그 정도의 돈을 벌려면 적어도 한달은 사냥을 했어야 했다.


그 때부터 게임을 하면 사냥보다 장사에 집중했다. 먼저 튜토리얼을 따라가면서 최소한의 스펙을 만든다. 그리고 그 스펙으로 자금을 만들고 장사를 시작한다. 장사는 급매물을 싸게 사서 필요한 사람에게 비싸게 파는 방식이 나에게 맞았다. 게임 내 경매장 시스템에서 이 재미는 더욱 배가되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최고급 장비를 맞췄다. 좋은 장비는 더 어려운 사냥터를 가능하게 했고, 그곳에선 더 비싼 아이템이 떨어졌다. 사냥과 장사, 장비 업그레이드가 맞물리는 손해보지 않는 시스템이었다. 분명 나는 영리하게 자본을 굴리던 장사꾼이었다. 게임 속에서 그토록 원하던 좋은 장비로 많은 몬스터를 휩쓸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현실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미련하게 맨땅에서 경험치를 쌓는 노가다에만 집중했다. 낮에는 실험실에서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실험을 하고, 눈이 침침해질 때까지 엑셀 시트와 실험 데이터를 만졌다. 그리고 다른 논문과 비교하며 사소한 빈틈을 메우는 데 온 에너지를 쏟았다. 나도 모르는 새에 성공은 곧 성실이라는 단어와 동일시 했다.

그래서 성실한 박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공략이 정해놓은 레벨업 경로를 충실히 따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흔이 될때까지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반복되는 실험과 공정 문제를 잡으며 나라는 캐릭터의 이력서 한 줄을 늘리는 데만 집착했다. 하지만 살을 빼고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서 조금은 달라졌다. 이 지루한 반복 끝에 내가 얻을 수 있는게 무엇인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진짜 갈망하던 것은 이런 성실한 노동에 대한 만족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모호했다. 그냥 제약 공정 전문가로 기억되고 싶다. 그리고 내 기술과 이름이 9시 뉴스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모호하다. 그래서 다시 한번 정리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정리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정리해봤다. 십수 년간 연구소와 바이오벤처에서 구르며 몸으로 익힌 것들이었다.


제약 생산과 품질 업무를 동시에 실무자와 관리자로서 수행했다. 인원이 적다보니 그 둘 업무를 같이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규정들을 거의 외우다시피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또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업무를 진행하다보니, 공정이 실제로 돌아가게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필요한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강의나 강연도 가능했다. 논문과 사업계획서, 제약 관련 문서를 포함한 다양한 기술 문서 쓰는 일에도 익숙했다. 나름 할 수 있는 부분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래서 이것들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어떤 일들을 다음에 해볼지에 대해서 고민해봤다.


바이오와 제약이라는 거대한 산업에는 수많은 불편함이 숨어 있다. 정보는 불균형하고,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며, 규제는 복잡하다. 심지어 규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불필요한 시험과 공정을 반복하며 말 그대로 쌩돈을 쓰는 회사들도 적지 않다. 누군가는 몇 달이면 해결할 문제를 몰라서 몇 년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지금 단계에서 굳이 안해도 되는 일에 몇 억씩 쓰기도 한다. 그것을 업계의 숙명이나 전문가의 영역처럼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기회로 보였다. 중소기업 컨설팅과 바이오벤처에서 구르다 생긴 경험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아예 전문 컨설팅으로 창업을 해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문득 유튜브에서 크몽 광고를 봤다. 업무와 관련한 강의나 컨설팅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 나도 최종목표를 완벽히 그리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팔아보자 생각했다. 먼저 지인을 통해 얻은 자리로, 강연이나 기술 컨설팅을 해봤다. 생각보다 내가 하는 얘기가 현장에서 먹혔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크몽 등 재능을 판매하는 사이트에 올려봤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나중에 또 다른 기회와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회사 명함 뒤에 숨어 던져준 문제를 해결하는 유능한 잡부로 남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레벨업을 위해 같은 사냥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기회를 포착하려고 한다. 더 이상 의미 없는 경험치에 매달리는 게임으로는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 안전한 사냥터를 떠나 불확실하지만 기회가 살아 움직이는 시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원하는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며칠이고 몬스터를 잡는 대신에, 내가 가진 아이템을 진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판매하는 장사꾼이 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흔이 되면, 그리고 이쯤이면 다 되어있을 줄 알았다. 어릴 때 보던 어른들이 그래 보였으니까. 하지만 돌아보니 나는 잘 짜여진 공략을 따르는 튜토리얼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튜토리얼을 끝내고 게임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어쩌면 이제야 진짜 게임이 시작된 걸 수도 있다.



1부 | 마흔에는 서울 자가에 정장 입고 일할 줄 알았다

- 끝 -





이전 05화마흔 이후에는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