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후에는 중요한 것만 남기기로 했다

1부| 마흔에는 서울 자가에 정장 입고 일할 줄 알았다

by 영초이
오랫동안 쓰지 않은 투명한 유리 빨대가 있었다.

하두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소복히 먼지가 쌓인 빨대가 더러워보여 닦아주기로 했다. 빨대의 겉에 묻은 먼지만 닦는다고 깨끗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겉이 깨끗해지자 안쪽이 훨씬 더 더러워보였다. 실제로 유리 빨대의 사용하기 위해서는 안쪽이 깨끗해야 되는데, 미련하게 겉만 닦으면서 깨끗해지길 원했다.

안쪽을 닦기 위해서 며칠을 고생했다. 흐르는 물에 씻거나 혹은 휴지를 돌돌 말아서 밀어넣기도 했다. 그러나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안쪽에 달라붙은 휴지조각 때문에 더 더러워졌다. 이 긴 시간 동안 열심히 한 쓸데없는 짓들로는 빨대 안쪽을 깨끗하게 닦지 못했다. 결국 편의점에 가서 작은 브러쉬를 사왔다. 이 작은 브러쉬로 1분만에 유리 빨대를 닦아낼 수 있었다. 만족할 만큼 깨끗해졌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방향을 잘못 잡으면 이런 상황이 생긴다.
결국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중요한 일을 먼저 생각해내고 실행하는 것이다.



살을 빼고 체력을 기르면 뒤죽박죽 엉킨 실타래 같은 인생이 마법처럼 풀릴 줄 알았다. 몸만 가뿐해지면 매일 아침이 활기찰 것이고, 마음속에 밀려있던 고민들도 명쾌하게 해결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웬걸. 막상 목표했던 몸을 만들고 나서도 내 일상은 전혀 단정해지지 않았다. 나름 큰 기대를 했기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는 겨우 유리 빨대의 겉면 먼지만 털어낸 것이었다.


여전히 아침에 눈을 뜨는 건 천근만근이었고, 책상 위에 쌓인 업무와 서류들은 매일매일 쳐내기 바빴다. 어제도 같았고 내일도 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릴 것이 뻔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예전에는 무기력함의 원인이 온전히 체력 저하와 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무겁고 기운이 없어서 일에 몰입하지 못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몸을 바로 세우고 나서야 진짜 문제가 드러났다. 사실 망가져 있던 건 몸만이 아니었다.


관심을 주는 대로 정직하게 반응하는 몸과 달리, 삶은 훨씬 복잡했다. 일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무심한 태도, 그리고 미뤄둔 수많은 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일에 모든 신경을 쓰고 있었다. 체력이 좋아지니 오히려 그동안 피로를 핑계로 외면해왔던 내가 원하는 삶이라는 문제가 더 명확해졌다.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내 일상이 내가 진정 원하던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또렷하게 고민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활을 하나씩 점검하며 바꾸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덜어내는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을 반드시 해내야 한다면, 먼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하루를 천천히 곱씹어봤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한 운동을 하고 출근을 한다. 회사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충실히 보내지만, 그날그날 쳐내야 하는 업무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퇴근 후에는 두 가지 루틴이 있었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지인들과 저녁 시간을 온전히 즐겼다. 대부분 술자리였다. 집에 돌아오면 씻고 바로 잠들거나 아쉬움에 맥주 두어 캔을 더 마셨다. 이런 생활이 생각보다 만족스럽고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했다. 취미로 할 것이 없는 나에게 나름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두번째 루틴은 조금 더 건강했다. 나름대로의 자기 계발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퇴근 후 운동을 했다. 그리고 집에와서 저녁을 간단히 먹고 난 뒤에는 한두 시간 정도 논문을 읽거나 영어 공부를 했다. 그 다음에는 자기전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사실 충분한 휴식이라고 말했지만, 결국엔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었다. 겉으로보면 꽤 모범적인 루틴이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내게는 뜯어고칠 부분이 많이 보였다.


그래서 두 가지 중 비교적 건강해 보였던 루틴을 가장 먼저 바꿨다. 습관적으로 침대 머리맡에서 켜두던 유튜브 시청을 줄였다. 정확히 말하면 장르를 바꿨다. 복잡한 게임 화면이나 자극적인 콘텐츠 대신 실패하거나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채널을 보기 시작했다. 타인의 삶을 통해 나를 반추하는 시간으로 채웠다. 무의미하게 화면을 넘기며 시간을 죽이는 대신, 친한 선배가 옆에서 조언해 주는 것처럼 그 이야기들을 들었다. 이 시간은 30분을 넘기지 않으려고 했다. 쉴 때는 오로지 쉬는 행위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쉬는 것도 기술이 필요했다.


그다음으로는 의미 없이 반복하던 공부를 그만두었다. 이제는 책상에 앉아 얻는 이론보다 현장에서 부딪히며 얻는 지식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모르는 정보는 동료나 검색을 통해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시대다. 전공 서적과 이론을 무작정 머릿속에 쑤셔 넣는 일이 과연 지금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모든 이론과 공식을 알 필요는 없었다. 내가 잘하는 것을 더 잘하면 됐다. 대신 일을 하다가 정말 머리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면, 그때 다시 책을 펼치기로 했다. 결국 구독을 유지하던 영어 강의 구독도 끊겼다. 지속 요건을 못채웠다. 하지만 영어공부 대신 외국 인물들이 얘기하는 유튜브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듣는 쪽을 택했다. 이렇게 하니 중요한 것에 몰입할 시간을 만들어주었고, 더 쉽게 몰입하게 되었다.


또한 유튜브 장르를 바꾸니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보게 되었다. 성공한 그들은 공통적으로 얘기하는 것이 있었다. 말과 행동이 인생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게 자신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말 보다는 행동이 더 큰 효과를 가져온다. 사실 생각해보면 사람은 무엇을 말했는가와 행동했는가로 기억된다. 그 사람의 생각이 현실로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무슨 사람인지 잊혀진다. 하지만 사소하지만 강렬한 행동이 그 사람의 평생 이미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지금까지도 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나는 무모하고 과감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 이미지는 중학교 시절의 아주 사소한 장면 하나에서 시작됐다. 운동장 옆 수돗가에서 친구들과 물호스로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물을 세게 틀어 호스를 이리저리 휘두르며 물을 뿌려대고 있었는데, 나는 그 호스를 잡겠다고 물줄기를 정면으로 맞으면서 그대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그저 순간적인 장난이었을 뿐이지만, 그 친구에게는 꽤 강하게 남았던 모양이다.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를 꺼내며 말한다. 그때 내가 물을 맞아가며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얘기한다.

"그때 진짜 미친 또라이 같았어."


또한 그 말이나 행동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 말이 묵직해지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일관성, 투명성, 그리고 진정성이다. 결국 말과 행동이 너무 쉽게 흘러나와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내 모습과 동떨어져서도 안 된다. 생각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태도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도 조금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는, 비교적 덜 건강한 루틴 속에서도 변화를 주기로 했다. 말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술자리에서 가만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첫 번째는 술자리의 이야기가 생각보다 반복적이라는 점이었다.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이야기 소재가 계속 돌아가며 등장했다. 감정적으로 말하느냐, 이성적으로 풀어내느냐,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표현만 조금 달라질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몇 가지 이야기가 형태만 바뀌며 새벽까지 이어졌다.


두 번째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이 부분이 더 문제였다. 감정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이야기는 점점 부풀려졌다. 술기운에 약해진 감정의 바구니에서 과거의 설움이나 기쁨이 줄줄 새어나왔다. 이야기를 듣는 입장이 되고 나니 생각보다 피곤했다.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지금을 살아가는 데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언젠가 기업 임원 한 분과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그 사람은 내 기준에서 매우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서 느낀 것은 단순했다. 내가 이전 술자리에서 느꼈던 그 두 가지가 그에게는 없었다. 반복도 없었고, 과거 이야기에 머무르지도 않았다. 그저 그날의 분위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식탁 위 음식, 창밖의 풍경, 그 자리의 분위기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이야기가 시작됐다. 다섯 명이 함께한 자리였는데, 다섯 사람의 이야기가 모두 달랐다. 덕분에 대화는 계속 새로웠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그 임원이 반복해서 말한 단 하나였다. "오늘 이 자리가 너무 즐겁네요. 정말 행복합니다."


그에게 그 식사 자리는 누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크게 거리낌없이 얘기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 또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존경하는 몇몇 분들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들의 대화법을 보며 나 역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세웠다. 당장 덜 중요한 것들은 잠시 미뤄두고, 가장 중요한 현재에만 온전히 집중하기로 했다. 과거는 불평의 대상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교훈으로 삼거나 잊고, 미래는 막연한 걱정 대신 대비하기로 했다. 다만, 이 교훈과 대비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기로 했다. 오직 지금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을 더 직시하며 살기로 했다. 미래 또한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억지로 붙잡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기로 했다. 켜켜이 쌓인 중요하지 않은 찌꺼기를 걷어내고 현재라는 핵심 알맹이에만 집중하는 것. 그것이 내가 찾던 유리 빨대의 세척법이었다.


이런 덜 중요한 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노력이 여전히 빨대의 겉만 닦는 일인지, 아니면 구멍 속에 다시 휴지 뭉치를 밀어 넣는 실수인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지금 최적의 도구를 찾아 끊임없이 시험하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타인의 시선이나 관성적인 습관을 비워내야만 지금 이 순간의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빨대 세척용 브러쉬를 찾는 중이다. 불필요한 일을 하나씩 걷어내고 나면, 언젠가는 내 삶이라는 투명한 빨대를 통해 내가 진짜 원하는 인생을 막힘없이 들이켤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내 방식이 맞았는지는 그때의 내가 느낄 만족감이 말해줄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전에 2년동안 살 빼는 과정에서 거의 잠수타다시피 건강에 몰두했다. 이후 본 지인들이 했던 평가가 기억난다. 한동안 없어지면 뭔가 바뀌어서 오는 사람. 지금도 한동안은 바뀌는 과정으로 바쁘게 지내야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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