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하고 있는 일, 딱 한 번만 다르게 해보자

3부 | 다시 시작해 보니 여태 해오던 방식과 달랐다

by 영초이

요즘 출퇴근 운전하는 차 안에서 사업가들 인터뷰 영상을 자주 본다.

사업 실패 후 다시 일어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외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우선 실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실행력은 명쾌하고 명확하다. 이해도 쉽고 반박할 필요도 없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스토리는 실패의 두려움과 성공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일단 먼저 해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그때 처리하면 그만이다. 로또에 당첨되고 싶다면 당첨 확률이 높은 명당을 찾아 헤매고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다. 당장 내 주머니에서 5천 원을 꺼내 로또를 사는 게 먼저다. 사지 않으면 기댓값은 영원히 0원이다. 실행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지만, 실행하지 않으면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나 자신을 바꾸라는 말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실행력은 행동의 문제라면, 이건 이외 모든 영역의 문제다. 이건희 회장의 말처럼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할까? 이 질문을 진지하게 붙잡고 있으면, 오히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게 된다. 너무 크고, 너무 막연하다.


image.png 매일같이 뛰던 뒷산.


지난 2년을 돌아보면 나름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운동 루틴을 만들었고 체중을 40 kg 정도 감량했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을 유지했다. 흔히 말하는 갓생을 살았다. 이 정해진 루틴을 벗어난 날이 한 달에 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저녁 약속이 있는 날에는 새벽에 일어나 루틴을 채웠다. 분명 이전보다 더 건강해졌고, 더 부지런해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삶 자체가 바뀌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생산성이 상승하지도 않았고, 내가 하는 일의 결과물이 질적으로 달라졌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단지 더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었다. 성실함은 기본이지만, 이것이 내 삶의 전환을 끌어오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부를 바꾼다는 상상을 해봤다.

지금 돈이 되는 분야는 단언컨대 AI다. 요즘엔 사업계획서에 AI가 없으면 투자도 어렵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그럼 AI 시대가 도래했으니 제약 분야를 떠나 반도체나 코딩을 처음부터 배워야 할까? 이런 생각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계산기를 조금만 두드려 보면, 금세 냉정한 답이 나온다. 그건 도박에 가깝다.


image.png 내가 데이터센터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는 이미 한두 분야에서 십수 년을 일해왔다. 연구실에서의 실패, 현장에서의 시행착오, 수많은 데이터와 경험이 쌓여 있다. 그리고 이 분야에 대해서는 매번 명쾌한 해답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상 이런 대응이 좋다는 의견을 낼 수 있다. 또한 일하기에 너무 불편하고 어려운 것이 많다. 개선할 부분이 보이고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분야로 간다는 것은, 그동안 쌓은 자산을 전부 현금화하지 못한 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마치 두쫀쿠가 유행한다고 두쫀쿠 사업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 사업에 투자하기 위해 쌓아놓은 몇 억 원어치의 재료가 유행이 끝나자마자 악성 재고로 남는 것 같은 일이다.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에 대한 더 현실적인 문제는 새로운 경쟁이다. 새로운 분야로 가는 순간, 나는 다시 신입이 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미 준비된 20대들이 있다. 그들은 체력이 다르다. 집중력의 지속 시간도 다르고, 회복 속도도 다르다. 밤을 새워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돌아오는 엔진을 가진 사람들이다. 또한 그중 소위 말하는 천재와 그에 버금가는 인재들이 있다. 내가 이걸 새로 시작한다고 따라잡을 수 있을까? 수능을 쳐서 의대를 간다고, 내가 날고기는 공부 괴물들 사이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닫아놓고 싶지 않지만 그건 어렵고 고된 일이다.


그래서 마흔에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분야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가진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집요하게 붙잡아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능력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분야에서의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거나 다른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나는 내 업에 대해서 꽤 단순하게 정의하고 있었다. 그저 회사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정리해 보니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사람이었다. 맡은 프로젝트를 문제없이 끝내고, 조직 안에서 신뢰를 쌓는 것이 내 직장생활의 목표였다. 그 자체로 틀린 방향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지금의 기반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내가 잘하는 일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잘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맡은 일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해냈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해봐야 그건 조직 안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였다. 인사 평가는 내부에서만 소비되는 점수일 뿐이다. 회사 밖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문득 한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봤을 때는 그 업무에 누구보다 정통한 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야 하는 사람이었고, 실무적으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문득 술자리에서 그 선배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잘하는 건 이 기계를 가지고 하는 걸 제일 잘하는 거지, 이 분야를 다 잘하는 건 아니야."


image.png 징그럽게 먹는다


그 말에 나도 동의를 했다. 그렇지만 요즘 이상하게 자꾸 생각이 난다. 결국 우리는 잘하는 것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걸 설명 가능한 가치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나만의 전문성을 회사라는 닫힌 시스템에서만 소모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일을 잘해도 동료들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성실히 일만 해서는 나를 찾을 이유가 없다.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찾아보게 만들어야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을 제일 잘하는 사람인가?
그리고 그걸 어떻게 다른 가치를 만들어볼 수 있을까?


고민의 끝에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했다. 내가 이미 발을 딛고 있는 지점을 기준으로 나를 다시 정의하는 것이었다. 사실 나의 목표는 바이오 스타트업에 합류하던 순간부터 명확했다. 실험실에서 탄생한 후보물질을 실제 사람의 몸에 닿아 약으로 개발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후보물질에서 임상 1상까지


그것이 서른 초반에 한 팀을 총괄하는 직급으로 스타트업 이직을 결심한 이유였다. 서른 초반이라는 나이에 신약 개발의 전 공정을 총괄해 본다는 것은 훗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자산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그동안 나는 레퍼런스도 없는 후보물질을 실제 임상시험용 샘플로 구현해 내기 위해 몸을 갈아 넣었다. 편도 2시간이 넘는 생산 공장을 일주일에 몇 번씩 당일치기로 오가는 강행군을 견뎠고, 매일같이 이어지는 야근은 일상이었다. 예산이 부족하면 연구 책임자로서 발로 뛰며 외부 과제를 따와 자금을 수혈했다.


그 고군분투 끝에 결국 임상시험용 샘플 생산을 완수해 냈다. 비록 여러 대외적 사정으로 승인 절차는 진행 중이지만, 무형의 아이디어를 유형의 물질로 만들어낸 실체적 성과였다. 규제 기관의 엄격한 잣대와 기준을 넘으며 얻은 경험과 지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자산이 되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니, 이 모든 성취는 오직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유령 같은 기록이었다. 함께 동고동락한 동료들을 제외하면 세상 누구도 이 고된 공정을 알지 못했고, 관심조차 없었다. 문득 이 뜨거웠던 성과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회사의 이름으로 이 업적들을 직접 기사화하여 투고했다.

내 이름 석 자가 실린 기사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방법으로 내 이야기를 처음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본 것이다. 성실하게 일만 하면 언젠가 알아주겠지는 충분하지 않다.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세상이 알지 못하면, 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들이 자신의 귀한 후보물질을 나에게 맡기거나 컨설팅을 의뢰할 리 만무했다. 결국, 나를 증명하고 세상이 나를 찾게 만드는 것 또한 내 일을 하기 위해 갖춰야 할 필수적인 일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방법을 바꿔보았다. 내 일에 대해서 공적인 자리에서 발표를 시작했다. 회사를 대표해 강연할 기회가 있으면 자원했다. 강의나 강연 경험이 쌓이자 나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어 유튜브를 시작했고, 가장 자신 있었던 사업계획서와 논문 컨설팅을 부업으로 연결했다. 무엇보다 가장 자신 없던 글쓰기에 도전했다. 브런치에 올린 글들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콘텐츠가 되는 과정을 보며 확신을 얻었다. 역시 방법을 바꾸고 실행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완전히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게 아니다. 나는 여전히 하는 일은 같다. 여전히 매일 데이터나 문서와 씨름한다. 다만 그 일을 나를 알리고 사람들이 나를 찾게 만드는 형태로 재정의했을 뿐이다. 이전의 결과가 회사 안에 머물렀다면, 이제 내 결과물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거대했다.




image.png 북적북적한 도시는 가까이서 봐도 아름답지만, 멀리 봐도 아름답다. 관점과 시야를 바꿔보자.


결국 핵심은 하나다. 내가 쌓아놓은 기반이 부실하지 않다면 새로운 땅을 찾지 말고, 지금 딛고 있는 땅을 새로운 방식으로 일궈보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경험을 다른 형태로 꺼내보고, 알고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며, 내가 해온 일을 시장에서 통하는 가치로 바꿔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내 일이 가치가 없다면 당장 버려버릴 수 있는 행동력도 중요하다.


기업이 제품의 용도를 확장하기 위해 마케팅을 하고 컬래버레이션을 하듯, 우리 자신도 나라는 제품을 세상에 판매하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봐야 한다. 연봉을 높이든 내 사업을 하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한 영역에 적용해 보면 상상할 수 있는 미래가 많아진다.


거창한 결심은 필요 없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딱 한 번만 다르게 해보는 것.

마흔의 진짜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이전 10화마흔, 인생의 중간정산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