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맑음

by 샤인

비가 오는 날에 운동을 가는 길은

날이 맑을 때보다 기분이 좋다.

비가 옴으로써 사람들이 덜 나오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불편하고 좀 더 오래 걸릴지라도

조금 더 한적하게 운동할 수 있다는 게 좋다.


하지만 오늘은 이 기분이 오래가지 못했다.


웨이트를 하고 수영장으로 걸어가는 길,

누군가 우산을 바꿔갔는지 내 우산은 없고

비슷하게 생긴 망가진 우산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 우산은 펴지지도 않았다.


내 목표는 수영을 하러 가는 거였기에

비가 온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비에

옷은 다 젖고 기분은 찝찝해졌고

신호등은 또 계속 걸려서

짜증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홀딱 젖은 채 도착해서 한 번 옷을 털었다.


이 센터는 키오스크 결제 방식인데

총 2대 중 한 대에는 아무도 줄을 서 있지 않길래

얼른 눌렀더니

카드를 넣기도 전에 자꾸 결제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


그제야 알았다.

오류가 떠서 한쪽만 줄이 길었던 거였다.


여기서 짜증이 한 번 더 터졌다.


샤워하면서

‘이미 들어왔으니까 이제 수영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 화를 식혔지만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힐링수영을 해야겠다’

라고 마음속으로 정했다.


사실 오늘 만든 단어인데,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그냥 물에 나를 맡기는 방식이다.


눈을 감고

내가 팔을 몇 번 저으면 도착하는지,

음파음파 몇 번이면 끝까지 가는지를

몸으로 기억하는 식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되니

어린이 전용라인 중

사람이 없는 쪽에서

10분간 천천히 탔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니까

마음이 차분해졌다.

몸도 풀려서 본 레인으로 들어왔다.


근데 마음가짐 때문인지

오늘은 유독 숨이 너무 찼다.

1바퀴 타고 쉬고,

또 1바퀴 타고 쉬고.


길게 심호흡을 하고

충분히 멈춘 후에야

다시 타기 시작했다.


쭉 리듬을 타다 보면

자연스럽게 장거리로 전환이 된다.


나는 단순노동이나 단순반복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 지루함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다.


근데 딱 한 가지,

그게 쌓여서 눈에 보일 때는 재밌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항상 10바퀴가 넘어가는 시점에는

욕심이 정말 많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한 번 한 번에만 집중하자’며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오늘도 20바퀴가 다 되어가자

내가 재밌다고 느끼는 순간과

기존 기록에 가까워졌다는 상황이 겹쳐서

흥분이 약간 올라왔다.


솔직히 수영을 할 때마다

‘오늘은 최고기록을 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20바퀴를 찍고

21바퀴째를 향해 턴을 할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런 단순반복—

정확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런 반복이 쌓여서 과정이 되고

그러한 과정들이 쌓여서

결과가 나오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단순반복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걸 피하는 게 맞는 걸까?


그런 딜레마가 스쳐갔다.


오늘은 25바퀴로 마무리했다.

아마 수영하면서 처음으로

3분도 안 쉬고

계속 물속에만 있었던 날일 거다.


20바퀴를 하고 나왔을 때와

25바퀴를 마친 후의 피로도는

확연히 달랐다.


내 자세가 올바르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겉으로 보이는 건 비슷했겠지만

몸이 반응하는 걸 보면

밀도나 소모량에서의 차이는

엄청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오늘 수영은 이상하게도

처음보다 끝이 더 또렷하게 기억난다.


단순하고 지루한 반복이라 생각했던 것도

결국 쌓이고 나니까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기록보다 과정이,

과정보다 흐름이,

흐름보다 나 자신이

조금 더 보였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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