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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the new world

by 글짓는 미영씨 Mar 21. 2025

비행기에서 내려 땅을 밟던 날의 날씨와 공기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나를 반겨주는 야자수와 푸른 하늘, 생전 맡아보지 못했던 청정도 A급의 공기까지.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상쾌한 기분은 마치 게임 리셋버튼을 누른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마트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부터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까지 외국인이 드물던 한국에서 벗어나는 경험은 내 마음에 다시 꿈을 불어넣었다.


처음 들어간 어학원에서 친구들을 사귀고, 같이 놀러 다니고 하며 점차 이곳에서의 생활이 나에게 더 맞는다는 착각에 빠져갔다. 아직 차가운 현실에 데어보지 않은 채 긍정회로만 돌리는 어린아이였다.


어학원을 마치고 대학교 수업을 시작하면서 악몽은 되살아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는 교수님,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동기들에 뭐든 주체적으로 하는 이 나라 사람들은 대학생활에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았다.


동아리부터 파티까지 전부 인맥을 통해 알음알음 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여기라면 다를 줄 알았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행자의 입장에서 새로운 나라는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놀이동산이었지만, 이민자의 입장에서 이 나라는 또 다른 벽이자 미지의 정글이었다.


어디든 발 디딜 곳을 찾아야 하고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배경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었다. 결국 어디를 가든 내가 가는 곳은 시간이 흐르면 검은 물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박정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의 한 구절처럼 떠날 때부터 다시 돌아갈 것을 알게 되어버렸다. 학부 성적은 당연 F투성이었고,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정신을 차리고 당시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알바를 뛰며 존재감은 없더라도 나한몸 벌어먹을 수 있는 정도의 사람 구실을 했다. 물론 만족스러운 생활은 아니었지만, 아이처럼 주저앉아 신세한탄만 할 수는 없었기에, 차오르는 잡생각을 떨치고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현실과 타협해갈 때쯤, 다시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두 달간의 어학연수. 다니던 대학교의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과정을 마치면 학점까지 인정해 준단다. 이미 결과를 아는 길을, 다들 미쳤다고 할 길을, 지금 뛰는 심장이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마음이 갔다.


'그래, 두 달 여행한다 셈 치고 다녀오자. 앞으로 이런 기회 다신 없을 텐데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갔다 오자.' 고심의 고심 끝에 잔소리하는 머리를 살살 달래서 끝내 인생을 뒤바꿀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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