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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행복 일지 (1)_

후라이팬 하나 냄비 하나

by 현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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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를 선물 받았다

하얀 면포 같은 재질에

겉에는 더 하얀 재봉질이 되어 있고

초록 클로버들이 새겨져 있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득한,

조그만 체구의 큰 행복을 선물 받았다


그 책갈피를 검고 작은 글자들 사이사이에

꽂아 넣어 함께하도록 두면

무언가 모를 뭉클함을 느낄 터였다


초록 아기꽃들이 뭉게뭉게

검은 풀밭을 가득 채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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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서 집에 돌아오는

열두 시 이십 분

무언가 먹기에 늦은 시간이다


머리를 굴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마저도 잠시,

찬장에서 후라이팬 하나 냄비 하나를 꺼내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인다


10초 만에 예선과 준결승전을 거쳐

내 손에 쥐게 된 라면에게

1위를 한 소감이 어떻냐고 묻기 전에

봉투를 뜯어 면을 우선 앗아간다


보글보글 쳐대는 물보라에

몸을 기대어 맡긴 면들을 보아하니

따뜻한 온천수가 생각나 기분이 썩 좋겠다 싶었다


며칠 전부터 머릴 맴돌던

반숙후라이를 만들어야겠어서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인덕션 호환이 안 되는 냄비라

따로 구비해 둔 하이라이트로

두 가지를 적절한 타이밍으로 만들어야 한다


아무렴 어때

나는 잘 해낼 수 있다


지금 시간은

열두 시 사십 분

무언가 먹기에 딱 좋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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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내가 지하철에 타는 건지

얹혀서 이동당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앞으로 맨 가방 안에서 손뼘만 한 책 한 권을 꺼냈다


아무래도 책에 관심이 있다면

누군가 책을 꺼내 읽는데

그것이 코앞의 내 눈에 들어왔을 때

읽히고 마는 글들을 완전히 무시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

좋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고개를 푹 눌러 숙이고

작은 네모상자들을 바라보고 있는

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왠지 모르게 고전적이고 엔틱 한 느낌이 드는

이 책들의 날개 한 장 한 장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이러한 나의 낭만을

몰래 읽는다 하더라도

무언가 더 좋은 느낌이다


나라도 그런 낭만이라면 훔쳐 읽었을 페이지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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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좋다

사실 좋다기보다 사랑스럽다

잘 모르겠다

사랑스러운 걸 좋아해서 아기가 좋은 걸까

이 세상의 모든 게 다 아기처럼 보인다

아기 버스, 아기 책, 아기 나뭇잎 •••

내 눈의 필터 중에

가장 애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틈만 나면 아기들이 보인다

온통 세상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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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에 닿아 눈부시도록 흐드러지는게 좋다

시커멓게 단단하기만 한 아스팔트도

햇살을 맞아 녹으면 그저 하얗게 빛난다


햇살에 부벼 모락모락 나는

어느 고양이의 꼬순내가 좋다

자외선 살균기에 꽂은 칫솔처럼

무언가 악한 것은 사라지고

보송하게 코팅되어 가는 고양이의 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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