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여행의 이면
"예에? 무전여행 가신다고요? 미쳤구만 미쳤어~"
"아니~ 늙은이들이 노망끼가 들었나~"
"천대받을껀데~~"
"가시다가 분명 돌아오실꺼야~ 내 장담해!"
산적은 걱정 안되는데 나는 걱정된다는 둥, 굶을 거라는 둥, 요즘 세상에 무전여행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는둥, 낼 모레 환갑이 다 된 늙은이들이 뚱딴지 같이 무전여행이라니 갑자기 변하면 어떻게 된다는 둥, 젊은이들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무전여행인데 겁도 없이 떠나겠다니 다들 그랬었다. 더군다나 추석 대목이 낀 달에~
누가 뭐라 해도 소신을 굽히지 않던 산적. 배낭 자체 무게 만도 3Kg가 넘는, 선물 받았던 군용 배낭에 이것저것 쑤셔 넣어가며 준비하기를 두달 남짓 했다. 나는 나대로 산적을 주욱 지켜봐 온 세월이 있던 터라 아무말 없이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다. 처음엔 딸래미 고교시절 책가방을 개조하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굴러다니던 등산용 배낭을 개조했다. 드디어 대망의 여행길에 오르려는데 엄마야~ 이걸 어째~
8월 말이 되어 태풍 볼라밴이 불더니 우리집 대추나무건 농장의 뽕나무건 다 쓰러뜨려버렸다. 부설 시설물도 넘어뜨려버리며. 에이~ 까짓것쯤이야 다녀와서 치우지뭐~ 서로 의기 투합. 대망의 무전여행을 떠났었다.
카드도 돈도 없이 딸랑 신분증만 가지고 무식하고도 용감하게 대문을 걸어 잠그고 뚜벅뚜벅 떠난 우리들.
첫 해엔 잉리아(화순 옛지명)를 출발하여 순천,진주,삼천포,고성,통영,거제,김해,양산,울주,밀양,청도,대구,구미,성주,김천,영동,무주,금산,대천,공주,부여,서천,장항,군산,진주,김제,정읍,담양,곡성,광주,화순으로 되돌아오기까지 경상남북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6개 도와 30개 시,군을 들르며 걷고 보고 듣고 느끼기를
스무여덟일이었다.
하루하루가 꿈 속 같기도, 만화경 같기도 했었다. 사람들과 얘길 나눌 땐 슬프기도 우습기도 안타깝기도 했었다. 점심 공양 소리 들리던 절에서는 배고픈 발길을 돌려야했고, 비 오는 날 자고 일어나니 공동묘지 앞이기도 했다. 이층 콘크리트 건물 옥상에서 자다가 밤에 비를 만나 반쯤 물에 잠겨 자기도 했고, 비 오는 날 울퉁불퉁한 돌자갈 위에 종이 박스 깔고 자기도 했다. 검찰청사 건너편 절개지 노변 밑에 텐트치고 자다가 물벼락 피해텐트를 옮기기도 했다. 밤 늦게 잘 곳 찾아 씻고 라면 끓여 먹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붉은 흙탕물이기도 했고, 폭, 깊이, 60Cm 농수로에서 씻기도 했었다. 기차가 덜컹거리는 철로 옆에서 자기도 했으며 변소간 옆에서 자보기도 했다.
여자로서 그런저런 것들을 참고 즐길 수 있었던 이면에는 십수년 전 인천에 살 때 보았던 장면 하나가 있었다. 어느날 일 보러 갔던 서울의 환승역 신도림에서 뵈었던 노스님의 모습. 숱한 사람들의 어지러운 발길들 속에 태연히 가부좌 틀고 앉아 고요하고 단아하게 탁발하시던 노스님.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느껴졌었다.
뇌리 속에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기며 판박이처럼 남아 있던 모습. 그 모습이 여행 도중 문득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노스님도 그렇게 탁발을 하셨는데 나는 아직 젊잖아~ 라고.
여행 동안 길거리의 먼지란 먼지는 원 없이 들이마셨고, 각종 차량들이 내뿜던 배기가스와 매연가스 또한 원 없이 마셨다.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거리의 문화가 좀 더 다양화 됐으면 싶었고, 야영지가 더 늘었으면 싶었다. '가난한 사람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정말 터무니 없는 말임을 눈 시리도록 느꼈었다.
허리가 ㄱ자로 꺾인 할머니, 몸 한쪽이 마비된 할아버지, 외팔이 아저씨, 하체가 불구인 사람 등등 장애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아내려는 모습에 나는 경건해지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더욱, 함부로 쓸 수 없어 돈을 모았다. 동전부터 천원 지폐, 만원 지폐, 십시일반 모아졌던 귀한 돈이었다.
그 돈은 해마다 귀가 하기 전 기부했었다. 울 산적의 뜻으로.
우리 사회 아직 그리 각박한 사회는 아니라고 본다. 이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들의 힘이다. 어쩌면, 그러저러한 것들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무전여행은 미래의 철학자를 키워내는 참 교육의 현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지금은 무등산 밑을 떠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