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면체 사랑 -3부

명희의 회복과 시골교회의 일상

by 일도

명희는 세브란스에서 받은 약을 꾸준히 복용했다.

그리고 석 달 후, 언제 아팠냐는 듯 통증은 사라졌다.


명희는 동생부부가 떠난 뒤, 거울 앞에 섰다. 찡그리지 않아도 되는 얼굴, 쿡쿡 쑤시던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 낯선 평온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일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까.”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약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선, 그보다 더 깊은 무언가가 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숨 쉴 수 있는 오늘, 그 단순한 자유가 더 큰 위로였다.


그녀는 느티나무 아래에서 바람이 불어오며 마음속 무게가 비로소 내려앉는 느낌.

그것은 약이 아닌, 스스로에게 허락된 공간에서 시작된 치유였다.


『천택리(天澤履)』의 ‘리(履)’는 ‘밟는다’는 뜻이다.

발아래 놓인 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위를 어떻게 걷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하지만 그들의 발에는, 혼란과 갈등의 길을 견뎌낼 만한 안전하고 단단한 신발이 없었다.


하나님만 따르면 된다고 믿었지만

그러나 현실이라는 진창과 감정이라는 자갈길 위에선, 믿음만으로는 부족한 순간들이 있었다.


그 길 위에 필요한 건 때로는 인간적인 지혜와 서로를 향한 조심스러운 배려였다.

그 모든 것을 ‘밟아’ 지나야 하는 길. 그것이 천택리의 가르침이었다.



『제11면체 地天泰』


작은 것이 가고 큰 것이 온다.

하늘은 내려오고 땅은 올라가야 비로소 통하게 된다.

땅 위에 하늘이 놓인 형상, 소통과 평화의 시절이다.



풍산리 마을에는 하루 네 번 버스가 다닌다.

소도시로 향하는 그 버스는 학생도, 직장인도, 약속 있는 노인들도 기다리는 귀중한 발이다.


명희는 종종 아침 버스를 놓치곤 했다. 허둥지둥 달려 나가다가도 어김없이 늦기 일쑤였다. 보다 못한 일도가 결국 오토바이 한 대를 장만했다. 시골에서 눈에 띌 만큼 새것, 120cc짜리였다.


“이제 이거 타고 다니면 아침 버스는 놓칠 일 없겠지.”


오토바이 키를 건네며 일도가 말했다.

그날부터 그는 매일 명희를 태우고 마을을 벗어나 큰 도로가있는 삼거리까지 데려다주었다. 그곳에서는 버스가 자주 다녔다. 둘은 느티나무 보호수를 지나고, 포도밭 사이를 달렸다. 초록 포도잎이 양옆으로 펼쳐진 그 길 위에서, 일도는 결혼 전 명희와 함께 타고 다녔던 낡은 오토바이를 떠올렸다.


‘지금 타는 이건, 정말 멋지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다.



한때는 지루할까 염려되었던 시골살이였지만, 부모는 의외로 바쁘게 지냈다. 어머니는 교회 마당 한편 텃밭에 고추며 가지, 상추와 파를 심고 정성껏 돌보았고, 아이들 밥을 차리고 씻기고 입히며 집안일까지 거의 도맡았다.


“얘들은 내가 키운다 생각하고 있어. 걱정 말고 네 할 일 해.”


아이들이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어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아버지는 주로 방 안에서 지냈다. 사람을 만나거나 밖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고, 막걸리 한 잔 곁에 두고 텃밭을 다듬거나 작은 그루터기에 앉아 성경을 들여다보곤 했다. 돋보기를낀 채 천천히 성경을 읽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어딘가 편안했다.


서울에서 세탁소를 하던 시절, 어머니는 운동용 자전거를 사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멀리까지 타고 다녔다. 아버지에게도 같은 자전거를 사주고 함께 타자고 했고, 아버지는 한동안 어머니와 자전거를 나란히 타고 다니셨다. 그랬던 아버지가 요즘은 교회 예배에도 나오고 찬송가도 조용히 따라 부르신다.


“물하자 하 씨 문효공 16대손이 이 집안의 뿌리다.”


옛 제사 문제로 갈등이 많았던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그 뿌리 위에 신앙을 얹는 일이 어색하지 않아 보였다.



부모가 함께 살게 된 건 단지 육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생계와 생활력 문제도 함께였다. 자식 곁에서 사는 일은 서로를 살리는 일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다섯 살과 네 살이 되었다. 동네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구멍가게에 가서 과자를 사기도 하고,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막걸리를 사 오기도 했다. 심부름은 늘 첫째, 지영이의 몫이었다.


지영이는 갸름한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는데, 그 눈은할아버지를 꼭 닮았다. 명랑했고 말이 또렷했으며, 동생에게양보도 잘하는 장녀다웠다.


신영이는 애착 인형을 늘 들고 다녔다. 반짝이는 것, 예쁜 것이라면 뭐든 좋아했고, 오밀조밀한 눈매에 통통한 볼살 덕분에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자매가 다투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지영아, 동생한테 양보하자. 그래야 언니지.”



어느 날, 일도가 오토바이에 앉아 있을 때였다.

지영이가 달려와 외쳤다.


“아빠! 나도 오토바이 타고 싶어. 뒤에 태워 줘!”


곧이어 신영이도 쪼르르 뛰어왔다.


“나도! 나도 앞에 앉을래!”


일도는 지영을 뒤에 태우고, 신영이를 앞에 조심스레 앉혔다. 기름탱크를 꼭 껴안은 신영이는 연신 웃었다. 세 사람은 시골길을 천천히 몇 바퀴 돌았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판에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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