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볶이라는 이름의 추억 한 접시
스웨덴의 겨울은 길고도 조용했다. 오후 세 시만 넘어도 창밖은 금세 어두워졌고, 입김이 하얗게 흩어지는 부엌 안에서 나는 로제 떡볶이를 만들고 있었다.
떡은 아시아 마트에서 어렵게 구했고, 고춧가루는 소중해서 늘 조금씩 아껴 썼다. 대파와 어묵은 구할 수 없어 양파와 피쉬볼로 대신했고, 소시지와 우유, 고추장을 넣어 소스를 만들었다. 익숙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모양은 떡볶이 같았다.
리키는 식탁에 앉자마자 한입을 먹었다. 입안에 넣자마자 눈이 커졌다. “한국에서 먹었던 맛이랑 비슷하네?!”
입가에는 로제 소스가 묻어 있었고,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떡을 집어먹었다. 매콤한 듯 부드러운 맛에 중독된 듯, 그는 방금 전까지의 조용함을 잊은 듯이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키는 떡볶이를 먹으면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건 무조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음식이야.”
그 말이 맞다.
떡볶이는 맵지만 부드럽고, 단순하지만 풍부하다.
함께 먹으면 더 맛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눌 때 가장 따뜻하다.
그에게 떡볶이는 신기한 음식이었다.
처음에는 빨간 소스가 조금 무서웠다고 했다.
하지만 한입, 또 한입— 고소한 치즈가 섞인 로제 소스가 혀를 감싸고, 쫀득한 떡이 이질감 없이 씹혔다.
살짝 매운 고춧가루 향이 코끝을 스치고, 단맛과 감칠맛이 입 안 가득 퍼질 때—
그는 이걸 ‘익숙하지 않은데도 그리운 맛’이라고 표현했다.
“처음엔 왜 이걸 먹는지 몰랐는데, 지금은 그냥... 계속 먹고 싶어져.”
그 말이 너무 한국 사람 같아서 웃음이 났다.
로제 떡볶이를 먹는 리키는 항상 조용해진다.
입이 바빠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감탄하며 먹느라 집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스를 흠뻑 머금은 튀김을 한입 베어물 때마다 눈썹이 살짝 올라가고,
입안이 매워질 땐 “맵다...”라고 중얼거리지만, 곧 다시 젓가락을 든다.
마치 떡볶이라는 음식이 가진 유혹을 거부하지 못하는 듯이.
로제 소스는 부드럽고도 묵직했다.
크림과 고추장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만든 주황빛 소스가, 떡볶이 떡에 달라붙어 탱글탱글하게 빛났다.
리키는 조심스럽게 떡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그 떡을, 입천장 데일까봐 후후 불며 식혔다.
“이거, 너무 뜨거운데... 너무 맛있어 보여.”
그는 떡을 한 입에 넣었다.
입 안에서 떡이 천천히 눌리며 퍼지고, 쫀득한 탄력이 씹는 재미를 만들어냈다.
치즈가 뭉근히 녹은 소스는 혀 위를 감싸며 매콤한 단맛을 남겼고, 고소함이 뒤따랐다.
“이 식감... 음. 이건 설명할 수가 없네. 이 떡, 무슨 마법 같아.”
다음엔 튀김이었다.
김말이를 젓가락으로 들어 소스에 푹 찍었다. 바삭했던 튀김옷이 로제 소스를 흠뻑 머금으며 색을 변해갔다.
베어무는 순간, 겉은 부드럽게 스며든 소스로 축축해졌지만, 안쪽은 여전히 바삭했다.
그 식감의 대비에 리키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 이건 반칙이지…”
입이 매워질 즈음, 그는 음료를 들이켰다.
그리곤 다시 떡. 다시 튀김. 멈추지 않는 젓가락.
이 음식은, 먹는 사람을 잠시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생각이 끊기고, 감각만이 남는 세계.
그런 리키를 보며 나는 웃었다.
로제 떡볶이 한 그릇이, 이렇게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한국에서 살 때 리키와 나는 주로 떡볶이를 배달시켜 먹었다.
스마트폰 몇 번만 누르면, 매콤한 냄새가 문 앞까지 찾아왔다.
처음 리키가 떡볶이를 먹은 날도, 집에서 비오는 날 하루종일 뒹굴거리다, 함께 떡볶이를 배달시킨 날이었다.
부드러운 주황빛 국물이 비닐 포장 속에서 뜨겁게 흔들리고 있었고, 튀김과 순대도 함께 도착했다.
리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젓가락을 꺼냈다.
"이건, 로제 아니야? 진짜야?"
그날은 매운맛이 살짝 도는 로제 떡볶이였다.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매운맛이 약한 리키를 위해 로제를 고른 날이었다.
리키에게 로제는 파스타에 들어가는 소스였다. 한국에서 로제 떡볶이를 처음 경험한 리키는 첫 입부터 인상적이라는 듯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스 속에 은근하게 숨어 있던 고추의 향이 리키의 이마에 땀방울을 맺게 했다.
"맵다…"
그러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튀김을 소스에 찍어먹고, 순대를 한 입 먹고, 또다시 떡을 찾아 집었다.
“왜 이렇게 맛있어?!”
그는 늘 그랬다.
매워도, 배가 불러도, 떡볶이를 먹는 날만큼은 모든 걸 잊고 행복해했다.
나에게도 떡볶이는 그런 음식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학원 끝나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먹던 그 맛.
작은 접시에 나눠 담아가며 “한 입만”을 주고받던 그 따뜻한 분위기.
일이 잘 풀리지 않던 날, 혼자 조용히 앉아 떡볶이를 먹으며 위로받던 저녁.
그렇게 떡볶이는 늘 내 곁에 있었다.
기분이 좋을 때도, 울고 싶을 때도.
어떤 날은 달콤했고, 어떤 날은 매웠고, 또 어떤 날은 마음까지 포근하게 감싸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떡볶이를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
함께 웃고, 함께 땀 흘리며, 함께 "맵다"를 말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떡볶이는 더 깊은 맛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떡볶이를 함께 먹은 순간들이 참 많다.
스웨덴의 작은 부엌에서, 한국의 배달 상자 앞에서, 식탁 위에서, 쇼파 앞에서.
그 어떤 고급 음식도 주지 못하는 위로와 온기를, 떡볶이는 늘 건네주었다.
뜨겁고, 맵고, 끈적한 그 음식 안에 우리의 이야기가 녹아 있었다.
입 안이 얼얼해질 때마다 더 가까워졌고, 혀끝이 아플수록 더 많이 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리키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떡볶이는 추억의 맛으로 먹는 음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