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그렇듯 적당한 무표정으로
묵묵히 할 일을 떠올리며
회사 건물 앞 자동문을 지나쳤다.
“아직도 이 회사 다니는 내가 참 이상하다.”
난 언제까지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얼마 전, 갑작스레 팀장이 자리를 비웠다.
약 6개월간의 공백기.
그 빈자리를 채운 건
경력직으로 갓 입사한,
나보다 딱 1년 경력이 많은 동료였다.
처음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차장이 팀장대행하게 됐네.”
의례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마음이 전혀 의례적이지 않았다.
처음엔 사소한 서운함이었다.
“나는 왜 아니었을까?”
“내가 이 팀에 더 오래 있었는데.”
“여기 시스템은 내가 더 잘 아는데.”
그 감정은 금세 변했다.
서운함에서, 부정으로.
분명히 내가 더 오래 있었고
더 많이 알고 있고
더 많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 자체를 부정했다.
회의 때마다
그 사람이 팀장을 대신해 앞자리에 앉는 게 불편했고
회의록을 정리하자는 어투가 거슬렸다.
내가 만든 자료에 피드백을 주는 태도는
거의 견딜 수가 없었다.
더 얄미운 건
그 사람의 존재보다
그 자리를 내어준 팀장이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동안 몰랐던 거야?'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이렇게 그냥?'
'적어도, 말 한마디는 해줄 수 있었잖아.'
정신이 아니라
존재가 무너지는 느낌.
나는 대체 뭘 위해 이 회사를 다니는 거지?
내가 없어도 되는 팀이면 굳이 이러고 다닐 필요 있을까?
결국 나는 가슴속에만 있던 사직서를
실제로 열어 버렸다.
이름을 쓰고
입사일을 입력하고
퇴사 희망일을 적고.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를 반복했다.
한 줄 한 줄 입력 할 때마다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결국 예상 하듯이 제출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왜 놓지를 못했을까.
생각해보면,
그 건 욕심이었다.
자리의 욕심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
내가 그동안
얼마나 조용히, 성실히, 성가시지 않게
팀을 위해 움직였는지를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알아주길 바랐다.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 팀에서 얼마나 묵묵히 일했는지
누군가는 알아줬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빠르게 움직이고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전에 정리하고
일이 굴러가도록 뒤에서 받쳐온 시간들이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허탈했다.
아무리 애써도
그걸 알아주는 사람은 없을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얼마나 쉽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도.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마주한 진실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완전히 받아들인 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과감했고
결정을 내릴 때 머뭇거림이 없었다.
무엇보다
윗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르지 않고
자기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선이 있었다.
쉽게 흔들리지 않는 태도.
때로는 그게 날카롭고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돌아보면 그게 바로
한 팀을 이끌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이었다.
나는 그럭저럭 일은 잘했지만
한 사람의 결정이 수십 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설 자신은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건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후배들을 잘 챙기고
묵묵히 보고서를 작성하고
팀 내 분위기를 살피는 데는 익숙했지만
팀 전체를 이끌고 책임지는 위치에는
어딘가 한 끗이 모자랐던 거다.
결론에 다다르고 나니
손에 꼭 쥐고 있던 억울함도
그걸 증명하려고 버텼던 욕심도
조금씩, 아주 천천히
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놓고 나서야 보였다.
바라보던 자리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향해 걸어오던 시간만큼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남아 있는 나는
아직도 묵묵히 일하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 이 자리가
내가 진심으로 책임지고 싶었던 자리였다는 걸
나는 이제야 깨닫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