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신을 부르는 마법의 주문
우리는 그것을 역병이라 불렀다.
커뮤니티가 잠잠하다가도 누군가 한 번씩 아름다운 것을 던지고 간다. 퐁당퐁당 돌멩이 수제비일 때도 있고, 돌덩이가 풍덩 파문이 일어 보석 친구들이 갑자기 물벼락을 맞기도 한다.
여왕님의 왕관을 장식할 만큼 크고 아름답고 루비, 작고 사랑스러운 루비, 분홍색인 루비, 형광인 루비, 투명도가 없지만 무늬가 아름다운 루비, 노을색이 도는 파파라차.... 갑자기 그 붉은 생기에 모두가 열광하며 너나 할 거 없이 자기가 갖고 있는 사랑스러운 것을 꺼내 올리고, 있어도 아쉬워 새것을 사러 뛰어나가고, 없으면 같이 보러 나갔다. 누군가 마법소녀풍으로 만든 루비 반지 디자인을 올렸고, 루비루비루, 누군가 루비를 갖고자 선망하는 주문을 만들었다.
한동안 루비를 비교하는 '살까요 말까요'와, 구입후기들이 속속 올라오고 장단점과 비교와 구입 시 주의점과 산지의 특징 같은 탐구가 이어졌다. 피존 블러드와 모곡의 유령이 커뮤니티를 떠돌았다.
보석은 가격이 천차만별이고 모습도 빛에 따라 달라진다. 가게에서 볼 때는 마음에 쏙 들었는데 가져와서 집에 보니 생각한 모습이 아니었고 내포물을 뒤늦게 발견한다거나, 가격 조사를 생략했거나 판매자의 마케팅에 홀랑 속아 넘어가서 터무니없는 가격을 지불하고 잔뜩 속이 상한 후가, 적당하게 저렴한 예쁜이를 들여서 만족한 후기들이 속속 올라왔다.
그 뒤로도 한 동안은 루비를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여기저기서 발견한 루비들을 들여다 보고 커뮤니티에 정보를 전하고, 무엇이 아름답게 보이고 내 취향이며 지갑이 허락하는지 고민해 보았다. 기왕에 보석 수집에 발을 들였으니 좋아하는 희귀석 이색석 외에 에루사다(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는 갖춰야 할까? 하지만 나의 부주의한 생활습관상 비싸고 약한 돌은 예뻐도 친해질 수 없다. 그냥 저렴한 아무 돌로 무지개 색상환 정도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대충 가성비로 구매했던 돌들은 사랑받지도 못했고, 팔리지도 않았다. 나중에 다시 들여다보니 나름 가격대에 충실하게 가장 아름다운 걸 골라내긴 해서 생각지도 못하게 내 취향인 보석상자를 선물 받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루비 역병은 몇 명을 앓아눕게 하고 지갑 몇 개를 털어간 다음 한풀 가셨다.
그리고 파파라차 역병이 돌고, 파라이바와 하우윈 역병이 돌았다. 워낙에 구하기가 힘든 스톤이라서 붐이 크게 일지는 않았다.
제다이 스피넬은 이거 어떠요, 저거 어때요? 물어보는 선덕선덕한 마음들이 정신없이 쏟아졌었다. 스피넬은 별로 비싼 보석이 아니었는데 제다이 붐 이후로 평범한 보라색 회색 스피넬들도 가격이 두 배정도 뛰었다.
진주는 모르니 말을 얹지 말자. 그 동그랗고 우아한 세계야말로 혼란의 도가니다. 정말 많은 진주 - 담수 해수 바로크 쌀알 핵진주 천연진주가 있고 전부 동그랗고 빛난다(....). 색차이나 진주층의 차이, 모패, 진주만 취급하는 유명 브랜드 등이 차례로 등장하고, 마지막에 하나다마-천녀가 등장하고 나서야 진주의 극은 막을 내린다. 사진만으로 본 하나다마 천녀는 진주가 아니라 은구슬 같았다.
조개가 낳은 불덩이도 있다. 콩크 진주의 모패인 소라(?) 콩크쉘은 분홍색으로 주얼리로 자주 쓰인다. 촉감은 일반 진주 보다는 돌의 질감이다. 콩크 진주는 아주 희귀하다. 콩크 진주는 붉은 몸색에 불결무늬의 섬광효과로 유명한데 워낙 희귀해서 국내에서는 보기 어렵고 해외 주얼리 페어에서 종종 목격담이 들렸다. 콩크 펄은 산호처럼 붉을수록, 불결무늬가 진할수록 가격은 천장부지다.
아래 사진의 핑크 외곽부분 희끄무레한 선들이.흘러다니며 빛을 발한다
2025 주얼리 페어에서 아주 연한 핑크색에 화염구조가 있는 실물을 직접 볼 기회가 있어서 불결무늬가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었다. 화염구조란 붉은 진주구슬에 불꽃 모양의 실크 광채(펄드 스파 비슷하다)가 유성우처럼 화라락 흐르는 모양이었는데 정말 신비로웠다. 지출 1순위 병원비와 2순위 교육비가 아니라면 현찰을 내고 그대로 들고 왔을지도 모르겠다.
커뮤니티에 보석 열풍을 구경하노라면 캠퍼스 커플들의 다각 썸관계를 이룬 시트콤을 보는 것 같았다.
온갖 사고와 좌충우돌 경험과 실수와 성공을 거쳐 모두가 결국 자기만의 보석을 만나고야 만다. 적당한 가격에 어울리는 보석을 찾아내서 세팅을 하고 착용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즐겁고, 그냥 나석인 채로 여러 채광을 즐기며 광합성을 하는 것도 즐거웠다. 어떤 모습이건 보석을 보는 눈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었고 나름 고수들은 사진만 보아도 그 돌이 무엇인지 90프로 이상 맞추어서 보석 수수께끼 놀이의 난이도가 엄청 높아진 적도 있었다.
명품이나 브랜드를 선호하지 않고 남들이 말하는 기준에는 별로 영향받지 않기 때문에 보석을 사는 것은 아주 마음이 가볍고 즐거운 취미였다. 저렴하고 예쁜 돌을 열심히 찾아내느라 시간이 잘도 같고, 방향이 잘못 흘러 값비싼 귀보석에 홀리면 합성석을 공부했다. 취미란 마음이 먼저 즐거워야 하는데 비싼 걸 사서 마음 무겁게 짐 지고 싶진 않았다. 천연의 최고의 칭찬은 합성 같고, 합성의 최고 칭찬은 천연 같다지 않던가. 내 취향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합성석도 적당한 가격에 예쁜 돌을 찾아낼 수 있었다.
루비를 구입한 곳은 이알에스하비-원석나라이다. 2005년에 만들어진 인터넷 보석 사이트로 내가 가진 희귀석-알렉산드라이트, 스패럴라이트 들은 전부 이곳에서 구입했다. 구입 후 직접 보고 1달 이내로 반품이 가능했다. 가넷이나 지르콘등 보석의 빛에 따른 변화를 모른 채 화면의 사진과 영 달라서 돌려보낸 보석들이 눈앞을 아른댄다. 나는 보석을 몰랐고, 아름다운 빛 조각들은 눈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사이트 자체가 자료 사진을 많이 제공하진 않는다. 하지만 구매자에게 시간을 제공한다. 그리고 정직하다.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판매품이나 감정서를 보는 법도 여기서 받아서 읽는 법을 익혔다.
엔조이비즈는 보석급을 포기하고 색상환과 천연원석의 신기한 특징들에 빠져서 (배보다 배꼽이 큰 격으로 저렴한 보석은 세팅값이 보석 값보다 비싸기도 했다;;) 탐험을 시작했다. 천연석만 취급한다고 되어 있는데 꿰어 놓은 비즈들을 보면 정말 이게 천연석일까 의심이 드는 것들도 있다. 그린 문스톤이나 미스틱 쿼츠나 펄드스파류는 랩이 아닐까 의심도 좀 해본다. 장식용으로는 충분히 아름답고, 색상도 튀지 않고 톤이 낮은 편이다. 천연석은 아주 고가의 돌이 아니면 채도와 맑기가 떨어진다. 합성석이나 큐빅은 채도가 높고 훨씬 더 저렴하다. (비싸고 덜 예쁘면 천연이라는 애매한 공식도 성립하는데, 비싸고 안 예쁜 가짜는 정말 많아서 뭐라 말할 수가 없다. 마음에 든 돌이 궁금하다면, 감정소에 가시라. 한미 감정소 약식 감정서는 6000원이다)
돈이 있어도 찾는 돌이 없고, 찾던 돌이 나타나도 총알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게 어긋나다가도 어느 때 딱 맞는 돌을 만나 버린다. 돌과 인연이 닿은 것이다. 내 경우 4캐럿 함침 루비인데, 나름 크고 투명하고 밝은 핑크-레드에 어딘가 오렌지 한방울, 최근에는 퍼플리쉬 한방울도 발견했다.
채광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
돌을 고르는 건 정말, 연인이나 결혼상대를 고르는 것과 비슷하다.
감당할 수 있는 최대치를 끌어모아 승부를 걸고, 일단 사면-연을 맺고 나면, 내보내기가(헤어지기가) 아주 어렵다. 팔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애물단지를 이고 지고 때로는 잊어도 본다.
우리(돌과 나)는 계속 서로를 새로 발견하고 상대(돌)에게 반응하는 내 태도와 반응에 돌이 모습이 달리 보임을 깨닫고 반성하기도 하고, 다른 채광과 다른 방향성을 발견하게 되면 돌의 다른 매력을 알게 된다.
싸웠다 만나고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연인들처럼 정이 떨어지다 붙고 붙은 자리가 더욱 견고해지면서, 결국에는 돌을 받아들인다.
아주 멋지고 비싼 돌은 내 깜냥에는 어림도 없어서 돌에게 차인다. 나는 들이대 보지도 않았지만 차이기도 많이 차였다. (나도 많이 찼다!) 이 에세이를 다 쓰면 이 사랑이 마침내 끝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