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도자기를 깼을까?
김윤하. 깨진 도자기, 상처로 물든 장미. 2025. 유리_스테인드글라스. 41x57cm
덜컹. 덜컹. 쨍그랑.
백자 도자기가 떨어진다.
슬픈 회색 빛이 묻어 있던 백자 도자기는 와장창 깨져 파편을 만든다.
날카로운 파편사이. 그 보다 날카로운 붉은색 피가 삐져나온다.
피는 끈적이고도 부드러우며 빠르게 흘러내린다.
붉은 선명함은 아름답고 잔인하게 느껴진다.
주변의 어둠은 밝아질 기미가 없고,
붉은 피는 순식간에 순백의 장미를 잠식시킨다.
어느새 상처로 붉게 물들고야 만다.
상처로 물든 가엾은 장미.
누가 도자기를 깨뜨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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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움, 전통, 도자기, 유리, 스테인드글라스]
이런 단어를 나의 작업에 담고, 동시에 창의성과 새로움을 담으려 애썼다.
작가라는 이름을 달고 싶으면 너도 나도 만들 수 있는 작품 말고,
나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장미에 미쳤다고 할 만큼 장미를 좋아하지만, 장미로 작품을 풀어내지 않았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미를 만드는 경우는 많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무도 하지 않았을 법한 연꽃, 꽃창포, 양귀비를 피워냈다.
작업에 관한 많은 고민을 나만의 감각으로 풀어내며,
나 스스로 꽃 길을 만들고 한발 씩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따로 있음을, 혼자 걸으며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 내 작품이 아닌 것도 방황하는 길 위에서 알게 되었다.
열심히 만든 작품은 sns에 올려도 좀처럼 사람들은 봐주질 않았고,
작업 이외에 시간을 더 들여 만드는 영상들은 10명의 하트를 받기도 벅찼다.
“저런 것도 하트를 많이 받는데.... 저렇게 만든 것도 사는데....
내 작품은 왜 사지 않는 걸까? 왜 좋아해 주지 않는 걸까?”
내 눈이 잘못된 것인가 눈을 비비고 비벼도, 해답은 나오지 않고 눈물만 나왔다.
몇 송이 작은 꽃만 겨우 피워 낸 초라한 길 위에서, 난 걸음을 멈췄다.
나에게서 원인을 찾기엔, 나에게 내 작품은 너무 소중했기에
당신들에게서, 너에게서 원인을 찾는 게 더 쉽고 편했다.
sns에 내가 쓰는 글들은 점점 비관적이었다.
세상에 외면받는 찐따의 발악이 가득 느껴졌다.
어떠한 결과도 가져다주지 않는 허망한 작업들이 점점 하기 싫어졌다.
안식처 같았던 작업실은 월급도 주지 않는 노동법 위반의 공장 같았다.
그렇게 소중했던 내 작품은 쓸데없이 무겁고, 둘 곳 없는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었다.
자기 전에 다음 작품을 구상하곤 했지만,
어느새 작업실 정리하는 순서를 읊어 보며 잠이 들었다.
내 안의 순백색 고결했던 장미는 그렇게 점점 붉게 물들고 있다.
잔인한 피로 얼룩덜룩해 진채로.
“당신들이 도자기를 깼잖아. “
역시나 남 탓을 하면 쉽겠다만, 실은 내가 부족한 것임을 안다.
현재의 나를 파괴하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타인의 안목이나 타인의 취향이 아니다.
나를 좀먹게 만드는 것은 바로 나.
오로지 과거의 나 그리고 미래의 나 일뿐이다.
나의 소중한 도자기를 깬 것은
나의 허기진 질투,
허황된 자의식 과잉,
부족한 재능,
그리고 끔찍한 게으름.
https://youtube.com/shorts/v79ubpWo6fY?si=M1wLICP1wese3r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