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도 없이
"어머니, 이런 영특한 딸을 두셔서 정말 좋으시겠어요."
"어머. 정말 넌 못 하는 게 없구나."
어린 나에겐 모두가 입을 모아 희망적인 말을 쏟아냈다.
반짝임이 차츰 덜 해지던 학창 시절에도
또래 친구들은 내게 말하곤 했다.
"넌 진짜 돈 많이 벌고, 성공하겠다."
"넌 나중에 크게 되겠다. 암튼 뭘 할지 궁금하다."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아이처럼
모두의 희망을 등에 업고 스무 해 남짓 살아 냈던 나는,
어른이 된 뒤로 줄 곳 보잘것 없어졌다.
아직도 그런 목소리들이 내게 남아,
가끔 악마의 속삭임처럼 귓가를 때린다.
'그랬던 너였는데, 지금 네 모습을 봐봐.'
'그래서 넌 지금 무엇이 된 걸까.'
'우습구나.'
어른이라는 말도 어색할 만큼 다 커버린 나.
그런 나에게 희망적인 사람은
오직 나 혼자 남았다.
.
.
.
새로운 봄이 시작되고
작업실 문 앞 콘크리트 틈새로 이름 모를 잡초가 죽죽 자라났다.
꽤 단단한 줄기를 가진 예사롭지 않은 풀이었다.
"이런 녀석도 꽃이 피려나? 무슨 꽃이 필까?" 하며 기다렸다.
내 허리만큼 커버리던 줄기는
벚꽃 잎이 떨어질 때까지 그저 초록잎만 무성했다.
"그럼 그렇지..." 시무룩해졌다.
가위를 가지고 나와 줄기를 싹둑 잘랐다.
휙 나무 밑에 던졌다.
꽃도 피우지 못하는 나와 똑같아 보였다.
괜스레 밉고, 괜스레 슬펐다.
사람들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꿈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현실판단은 멀리한 채,
되지 않을 희망만 노래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어릴 때부터 줄곧 그림을 그리며 무언가를 만들어 내던 나는
지금도 계속 그 행위를 하고 있지만,
어쩐지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헛짓거리가 되었다.
가진 것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것 때문에 가진 것이 없다.
자려고 누우면 떠오르는 영감들은
검은색 그림자로 다가와 편히 잠들려는 나를
굳이 악몽으로 끌고 간다.
무언가 떠올리는 것을 그만하고 싶다.
만들고 싶은 것을 그만 생각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를 묶어두고도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악몽으로 어지러워진 나의 밤들은
무겁고 새카매서
낮의 나를 더 초라하고 가엽게 만든다.
'정말 곧 그만둬야지.'
마음을 삼키고 터덜터덜 작업실에 가서 슬며시 문을 연다.
작업실 창문 앞에 서서 반짝이는 햇빛을 맞는다.
유리는 빛나기도 날카롭기도 하다.
그러면 어느샌가 검은 그림자는 사라지고
슬며시 미소가 삐져나온다.
춤을 추 듯 어젯밤 악몽 속 이미지들 속에서
더듬더듬 가장 예쁜 것을 찾아 손끝으로 만들어내고야 만다.
그제야 행복감을 느낀다.
재능은 마치 벌과 같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벗어날 수 없는 벌.
나는 목적과 결과를 잃은 지 오래지만
계속 그리고, 만드는 벌을 받은 사람처럼 산다.
돈으로 바꿀 수 없는 재능은 불쌍한 벌이다.
빛을 발하지 않는 재능은 구슬픈 벌이다.
나 혼자만이 끄덕이는 재능은 외로운 벌이다.
반복되는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는 재능은 멍청한 벌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지고 나 혼자 짊어진 재능은 정말 끔찍한 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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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비가 내리고 작업실 앞, 잘라냈던 줄기가 쑥쑥 자랐다.
며칠간의 폭염이 계속되자, 거짓말처럼 줄기에 꽃봉오리가 생겼다.
여름이 물러갈 때가 되어서야 샛노란 꽃이 활짝 피었다.
희망을 버리고 현실을 뒤집어 쓰려 마음먹었건만
노란 꽃이 눈치 없이 피어버렸다.
이제 나에게 희망을 품는 건 나 자신과 노란 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