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을 이룬 다는 것
남편과 결혼한 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다.
거기에 맞춰 큰 아들은 10살이 되었고,
작은 아들은 8살이 되었다.
요즘 들어 가족이 된다는 것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결합이라 느껴진다.
시간과 공간을 넘는 메시지.
.
.
.
자기중심적인 나는 가족을 이루는 것이 참 어려웠다.
"나"를 잃어야만 하는 것이 세상을 잃은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희생하는 것이 영 어색한,
나 같은 이상한 사람도
엄마가 된다.
햇빛아래 자유로움이 즐비하던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서,
안 어울리지만 기어코 샀던 선글라스는
큰 아들이 멋지게 쓰고 다닌다.
'큰 아들에게 주려고 샀던 걸까?'
생각이 스친다.
마이애미 해변에서 샀던 조개그림에 모래가 담긴
열쇠고리를 큰 아들이 달고 다니고,
페루에서 산 달걀을 나르는 라마 열쇠고리는
작은 아들이 달고 다닌다.
예쁜 여자 만나 연애할 때 쓰라고
시어머니가 남편에게 주신 빨간 우산을,
작은 아들이 쓰고 학교에 간다.
빙그르 돌리며 가는 모습에 우리의 연애할 때 웃음 짓던 모습이 스친다.
"웬일이야? 이렇게 이쁜 우산을 다 갖고 있어?"
"엄마가 주셨어. 여자 만날 때 쓰라고."
"어머나. 짱 웃기네 크크크."
.
.
.
내가 한창 젊음에 빠져 놀 때 듣던 노래를 아들이 듣는다.
"엄마. 빅뱅은 그럼 이제 몇 명이야?"
나의 생생했던 젊음이
아들의 흥겨운 춤에서 너울거린다.
내가 사랑을 잃고 울 때 듣던 노래마저도 아들이 듣는다.
"엄마. 나는 이렇게 느린 노래도 좋아."
시리던 가슴도 이제는 노래만 남았음을,
아들과 열창하며 따라 부를 수 있음을 느낀다.
어제는 무한도전 꼬리잡기 편을 보며
얼굴이 터지도록 웃는 두 아들을 보았다.
토요일 저녁 항상 무한도전을 보며 밥을 먹었던
나와 우리 엄마, 우리 아빠 단란했던
세명의 가족이 떠올랐다.
나는 어느덧 내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을 단단히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음을 뺏겼다는 생각이 강했었던 나.
그 생각에 빠져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때가 있었다.
이제야 빼앗긴 게 아니라,
나눠 줄 수 있게 된 것임을 알았다.
조그맣던 녀석들이 이렇게나 커서
나의 젊음의 조각들을 나눠 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애초에 젊음은 영원한 것이 아닌데,
나의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의 젊음을 보여 줄 수 있음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건 전에 없던 즐거움이자.
가늠조차 할 수 없던 행복이다.
행복은 별게 아니라,
시간을 타고 계속 이어져 오는, 일상에서 지속되는 이야기이다.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나를 잃는 게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나를 더 굳건히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