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하기 싫었는데...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말했다.
"그럼. 이제 너 인스타 해야지."
내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앞으로 무얼 만들고 싶은지,
어쩌다 유리라는 소재를 선택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다.
첫 전시회를 열고 따뜻한 충고를 많이 해주셨던
갤러리 관장님도 말씀하셨었다.
"작가님 인스타그램 하셔야지요."
전시회에 우연히 들어와 관심 있게 봐주셨던
중년의 신사분도 물어보셨다.
"작가님 인스타 아이디가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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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예술인도 sns로 홍보해야 한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해야 할 것 같아 이것저것 시작했다.
막차 꽁무니를 간신히 잡고 탔다.
원래 작업 순서는 이렇다.
작업스케치를 구상하고, 밑그림을 구체화시키고,
채색을 해본다. 많은 수정들을 거친 뒤
완성된 도안에 맞게 유리를 하나씩 잘라내고 갈아낸다.
동테이프를 하나하나 감은 다음, 납땜을 하면 작업이 완성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빛이 잘 드는 곳에서 사진을 이리저리 찍고, 포토샵으로 편집을 한다.
스마트 스토어에 파는 소품들은 가격을 정해 상세페이지를 만든다.
큰 대형작업들은 작가노트를 따로 적어 놓는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나긴 여정이다.
그러나 sns 때문에 완성으로 가는 길이 더 멀어졌다.
인스타에도 사진을 올리고,
유튜브에 올릴 스톱모션 영상을 따로 만든다.
스레드에는 친숙한 홍보성 글을 올린다.
좀처럼 반응이 없지만
'그래도 한 명이라도
내 작품을 봐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이어 왔다.
며칠 전, 브런치를 포함해 여기저기 다 공개한
[깨진 도자기, 상처로 물든 도자기]는
사실 한 달 전쯤 작품을 다 만들었다.
스톱모션 영상을 퀄리티 있게
만들고 싶은 마음에 영상 작업이 오래 걸려, 업로드가 늦어졌다.
다른 누군가의 영상을 짜깁기 한 것도, 아이디어를 베낀 것도,
Ai로 만든 영상도 아닌 순수 창작물.
조회수 400과 유튜브 좋아요 5개를 받는데서 그쳤다.
그렇다면 좋아요를 많이 받는 영상들은 무엇일까?
훌륭한 순수 창작물과 획기적인 영상들도 물론 많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뇌해서 만든 질 좋은 영상들 말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이미 만든 영상을 길이만 맞춰 올린 영상들도 많다.
편집이랄 것도 없이 tv프로그램 중요 부분만 잘라 올린 영상.
연예인 사진 몇 장으로 대충 때우는 영상.
그런 도둑 콘텐츠들 조차 몇십만이 넘는 조회수와 셀 수 없는 좋아요를 받는다.
쇼츠와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어떤 기준으로 보고, 공감하는 걸까.
처음엔 자신의 취향이 뚜렷했을지언정, 이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단순히 재밌는, 점점 자극적인 것만 찾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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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내 작업영상은 인기가 없는 게 분명하다.
'아니야. 내가 더 잘 만들면 될 거야.'
라고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깨진 도자기]를 올리고 반응을 보기 위해
핸드폰을 수시로 들여다보는 나를 보면서,
내가 너무 가여워졌다.
전시회를 연 것도 아닌데,
힘들게 한 내 작업을 올리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조회수가 적다고 내 작품이 별로인 건가.
공감의 하트수가 적다고 내 작품이 쓰레기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나 스스로 숫자의 노예가 되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와... 아니.. 난 처음부터 하기 싫었다니까?"
그대로 끌려가다가는 뼈만 남아,
정작 작업할 힘이 남지 않게 될 거다.
'아... 이건 아니다.
이제 그만하자...'
핸드폰에 모든 sns를 지웠다.
혹시 누군가가 내 작품을 표절하면,
증거가 될 수 있기에 계정은 내버려두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을 수시로 살피기보다는
그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영화 한 편을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걸 다시 가득가득 채워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게 처음부터 맞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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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남편과 연애할 때 재밌게 보았던 영화.
'위플래쉬'를 다시 보았다.
오늘은 두 아들과
내가 어릴 때 스무 번도 넘게 보았던
'둘리의 얼음별 대모험'을 같이 보기로 했다.
이제는 브런치만 남았다.
브런치도 언젠가 지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