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지만, 기업은 신용을 걸어야 한다"
이 명언은 김 회장이 한화그룹의 성장 과정에서 신용과 의리를 강조하며 한 말로, 기업 경영에서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세계를 뒤흔든 리더의 생애
김 회장은 1952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나, 서울 장충초등학교와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미국 멘로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드폴대학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 아버지이자 한화그룹 창업주인 김종희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해 29세의 나이로 그룹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한화그룹은 자산 규모 7,000억 원, 매출 1조 원 남짓의 중견 기업이었다. 김 회장은 그룹의 경영을 맡으며, 다양한 산업 분야로의 진출과 구조조정을 통해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고 성장 기반을 마련했다.
김 회장은 취임 이후 한양화학(현 한화케미칼)과 한국다우케미칼을 인수하여 석유화학 사업에 진출하고, 경인에너지 내국화를 단행하며 매출을 2배 이상 늘렸다. 이후 정아그룹(현 한화호텔&리조트), 한양유통(현 한화갤러리아) 등을 인수하며 3차 산업에 진출했다. 또한, 대한생명 인수와 태양광 산업 진출 등을 통해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했다. 그 결과, 한화그룹은 자산 규모 65조 원, 계열사 75개의 재계 순위 7위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현재까지도 한화그룹의 회장직을 유지하며, 방산 분야의 글로벌 시장 개척과 미래사업에 대한 선제적 대비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창원사업장을 방문하여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글로벌 시장 확대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
리더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김 회장의 인생에서 가장 큰 터닝 포인트는 1981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인해 29세의 젊은 나이에 한화그룹의 회장직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룹은 자산 규모 7,000억 원, 매출 1조 원 남짓의 중견 기업이었으며, 김 회장은 경영 경험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결단력과 추진력을 바탕으로 그룹의 체질을 개선하고, 다양한 산업 분야로의 진출을 통해 그룹의 외형을 확장시켰다. 특히, 석유화학 사업에의 진출과 3차 산업으로의 확장은 그룹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또한, IMF 외환위기 당시에는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해 그룹의 체질을 강화하고, 이후 대한생명 인수와 태양광 산업 진출 등을 통해 그룹의 중흥을 이끌었다.
거인의 어깨와 나란히 하려면
김 회장의 경영에서 배울 점은 결단력과 추진력이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 이를 추진하여 그룹의 성장을 이끌었다. 예를 들어, 석유화학 사업에의 진출과 3차 산업으로의 확장, IMF 외환위기 당시의 구조조정 등은 그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잘 보여준다.
김 회장의 능력은 기업 경영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중요한 덕목이다. 독자들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김 회장의 결단력과 추진력을 본받아 과감하게 도전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리더도 사람이다?!
김 회장은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던 진정필 선수가 백혈병으로 사망하자 치료비와 장례비를 지원했고,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이었던 최동원이 별세했을 때도 치료비 지원과 그룹 차원의 장례식을 치렀다. 또한, 천안함 피격사건 때는 유가족을 한화그룹 계열사에 우선 채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화들은 김 회장의 따뜻한 성격과 의리를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