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추위’는 단순히 날씨가 아니라 ‘고난’이 된단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걱정은 더 깊어지겠지.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잔뜩 움츠린 어깨와 서글픔이 가득한 장면일 것 같아. 엄마가 읽은 소설은 그렇게 추운 겨울, 1900년대 아일랜드에서 시작했어.
주인공 ‘펄롱’은 물려받은 게 없는 사람이었지만,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지. 손에 까만 숯이 묻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어. 다섯 아이를 먹이고 공부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하며 살았단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모습은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었지. 그 시절엔 일자리가 귀했고, 마을의 수녀원은 든든한 거래처였어. 또한 마을의 모든 행사와 교육의 중심이었지. 그래서 수녀원의 권위는 높았고, 한편으로는 고마운 존재였으니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불평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수녀원의 한 소녀가 그 평화로움을 흔들어 놓았단다.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이의 행방조차 알 수 없던 세라였어. 옷에는 젖이 스며 있고, 얼굴은 엉망이었지.
“죽도록 일할 테니 제발 여기서 나가게만 해줘요” 세라가 펄롱에게 애원하듯 이야기했어.
그 말을 들은 펄롱은 너무 혼란스러웠어. 수녀원은 사람들이 손댈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인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던 거지. 사실 그곳에는 많은 소녀들이 있었어. 얇은 옷만 걸치고, 무릎을 꿇은 채 바닥이 반짝거릴 때까지 닦고 청소하고 빨래하던 소녀들. 문은 밖에서 잠겨 있었고, 외부인을 보면 겁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지.
펄롱이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아내는 이렇게 말했어.
“그 아이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거기에 있겠지!"
살다 보면 모른 척해야 할 일도 있다며,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단다. 하지만 펄롱은 마음이 무거웠어. 세라의 얼굴과 목소리가 계속 떠올랐거든.
결국 펄롱은 주변의 반대와 앞 일의 두려움을 무릅쓰고 세라를 그곳에서 데리고 나왔어. 놀랍게도 수녀원은 저항조차 하지 않았단다. 그렇게 한 소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면서 소설은 끝이 났어.
세라의 간절한 호소가 오랫동안 나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펄롱과 부인의 내적 갈등은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내가 매일 마주하는 현실적인 고민과 겹쳐졌단다. 그래서 펄롱의 마지막 행동은 더 깊은 감동이었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래전 TV에서 봤던 '형제복지원 사건’이 떠올랐어.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은 ‘부랑인 정리’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가두었어. 형제복지원은 외부적으로는 국민포장과 국민훈장을 받는 등 명예로워 보이는 곳이었지만, 실상은 억압과 폭력이 만연했던 이었어. 생존자들은 그곳을 지옥이라고 불렀다더라. 종교를 강요당했고, 폭력과 강제 낙태, 불법 입양, 집단 성폭행까지 있었다고 하니 지옥이라는 단어조차 그들의 고통을 다 담지 못했겠지.
수녀원이 신의 이름과 권위로 모두를 침묵시켰듯,
형제복지원은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가난한 국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했단다. 그런데도 국가는 눈을 감았고, 경찰은 외면했고,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침묵했어. 그저 나만 아니면 된다고, 아마도 그곳에 있을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했던 펄롱의 부인과 우리는 참 많이 닮아있었더라.
그리고 2024년, 우리는 그런 장면을 봤지. 계엄령이 선포되던 그날, 여의도 하늘에 헬기가 떠 있고 군인들이 도로를 막았던 날. 그 추운 밤에 우리는 또 한 번 ‘침묵의 시대’를 강요받았단다. 다행히 사람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결국 계엄령은 빠르게 해제되었어. 그리고 너희도 알다시피 대통령은 탄핵되었단다. 아직 수사 중이고 또 재판 중이라 모든 사실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밝혀진 '수거 대상 명단'은 충격적이었어. 정부와 뜻이 다른 사람들을 조용히 없애서 더 이상 말하지 못하게 하려던 계획이었거든.
1900년대 아일랜드의 수녀원,
1980년대 형제복지원,
그리고 2024년의 계엄령까지.
시간은 흘렀지만, 침묵을 강요하며 부정한 권력이 진실을 억압하려는 구조는 반복되고 있어.
하지만 세라의 손을 잡은 펄롱, 형제복지원의 실체를 증언한 피해자들.
그리고 2024년 겨울밤, 여의도로 달려 나왔던 사람들이 이 반복을 끊어내기 위한 가장 날카로운 칼이지 않을까?
혹시 말이야 만약에,
네가 펄롱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형제 복지원에 갇힌 가족이 있었다면 어떻게 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