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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성과였고, 동시에 그의 표적이었다.

챕터 3

by But Tier

새로 부임한 본부장은 ROTC 장교 출신이며 B그룹 원년 멤버였다.

그는 상명하복을 철저히 강요했고 부하 직원을 하대하는 것이 익숙하며 늘 누군가를 압박하는 말투가 기본값이었다.

그런 그가 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 분위기는 눈에 띄게 바뀌었다.

회의는 재판장처럼 변했고 질문은 복종으로 대체됐다.

그의 질문에는 정답이 있었고 그 정답은 그의 생각과 같아야 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외부 출신의, 그것도 학벌조차 내세울 것 없는 직원에게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네가 감히?"
"어디서 감히 내 제안을 거절해?"


나는 단지 내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그는 나를 ‘상관에 대한 항명’으로 낙인찍었다.


매번 회의 때 단순히 업무를 보고받고 지시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늘 누군가를 몰아세우며 자신이 이 조직의 권력 중심임을 각인시키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불괘한 버릇도 있었는데 대화 중에 자신의 정수리를 문질렀다가 그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직원들은 그 장면을 애써 외면했고 그의 눈을 피했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캐릭터를 눈앞에서 보니 드라마가 과장만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가 부임한 후, 첫 번째 조치는
‘모든 지점의 물류부서를 본부로 통폐합하는 것’

유통기업에서 물류는 수익을 내는 부서가 아닌 ‘비용 센터(Cost Center)’여겨졌다.

본부장은 2년 계약직 임원이었고 단기간에 실적을 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비용 절감’이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빠르고 수월한 대상은 바로 인건비였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부서는 절대 인력이 과잉이 아니야."

"365일 교대 근무라면 지금 인력도 빠듯한 수준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8명이었던 우리 부서의 인원을 단숨에 4명으로 줄이고 해당 인원을 본부로 재배치하였다.

‘매출은 늘어가는데 인력은 줄어들었다.’

‘일은 쌓여가는데 일할 사람은 없었다.’

직원들은 지쳐갔고 나는 불안해졌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너, 효율화 TF 맡아."


2018년 연말, 물류운영팀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자연스럽게 경력과 직급상 내가 후임으로 거론되던 시점.

그날 퇴근을 앞두고 울리던 책상위의 전화벨 소리…. 본부장이 나를 호출했다.

본부장실에 들어가니 특유의 짜증내는 투로 말했다.


"네가 물류본부 인원 효율화 TF를 맡아."

"네?"


"각 지점 물류 인원이 너무 많아, 줄일 방법을 강구해서 보고서를 가져와."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석 달 줄게, 직원들이 알면 곤란하니까 겉으로 티 안 나게 알아서 해."
"인원을 반으로 줄여서 오면 운영팀장 자리 줄게."


그가 내게 던진 “절반으로 줄여” 그 한마디는 너무나 간단했지만, 내 가슴에는 천근의 바위처럼 내려앉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퇴근을 위해 옷을 갈아입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남긴 채 퇴근해버렸다.

그날 이후, 내 일상엔 조용한 균열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가 원하는 건 조직효율화 보고서가 아니라 퇴출 명단 작성이었다."


물론 대기업에서 공식적인 해고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았다.

’비효율적 인원’으로 분류되면 다른 부서로 ‘전환 배치’된다. 하지만 전환 배치는 사실상 퇴사 압박과 같았다.

예를 들어,
10년 넘게 물류에서 일한 직원을 법무팀으로 보내는 것.

✔ 물류 담당자를 갑자기 마케팅팀으로 발령 내는 것.

"우리는 인력 구조조정이 아니라 ‘순환배치’를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민 끝에, 한 달 후 본부장에게 중간 보고서를 제출했다.


"현재 업무량과 향후 증가할 물량을 고려하면, 지금의 인원도 많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인력을 줄이면 내년엔 운영이 어려워질 겁니다."

그러나 본부장은 이미 정해진 결론을 원했다.


"내년에 내가 여기 있을 것 같아?"

"그냥 줄여."


나는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인원을 줄이는 대신 영업팀 업무 일부를 우리가 가져오면 어떨까요?"

"우리가 영업팀의 잡무를 덜어주면 영업팀은 매출 확대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영업팀만 좋은 일 시키는 거잖아."

"안 돼. 하지 마."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한 기업의 임원이 회사의 전체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일 법한 제안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조직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건 이런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조차 아무런 견제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회사 전체의 성과를 위해 필요한 변화라면 조직 차원에서 최소한 논의될 수도 있었을 텐데, 모든 것은 본부장의 입맛에 따라 결정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이견을 제시할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결국 정해진 결론에 맞춰 보고서를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비효율 인원 명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내가 직원 퇴출 명단을 작성하고 있다는 소문이 내부에 돌기 시작했고 직원들은 나를 경계하며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사람들의 대화가 갑자기 끊기곤 했다. 친하게 지내던 직원들도 어느새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물류본부 소속 약 수십명의 직원 모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하지만 스스로 전출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나는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를 어떻게든 만들어서 명단을 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내가 이들에게 얼마나 원망 받을지, 얼마나 많은 오해를 살지 생각하면 가슴이 무거웠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나는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나는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잠들어도 두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극심한 불안감에 자주 깼고 피곤해도 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비슷한 경험을 군대 신병 시절에도 겪은 적이 있었다.

한밤중, 고참이 교대 근무를 시키거나 괜히 괴롭히려고 나를 깨웠다.

그때 바로 일어나지 못하면 몇 시간 동안 기합을 받았고,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늘 긴장한 채로 선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몸은 누워 있어도 머릿속은 깨어 있는 상태.

그때의 불안이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니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치밀었다.


결국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내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당신 요즘 너무 달라졌어. 아이들이 당신 눈치를 보고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정신과를 찾아갔다.


진단명: 불안장애
처방: 항불안제, 수면제

약을 복용하면서 잠은 조금 나아졌지만,
아내가 말했다.


"당신 평소에도 약에 취한 사람 같아."

"부르면 대답도 한참 뒤에 하고 말도 느려졌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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