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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보고서를 썼지만, 그들은 핑계를 원했다.

챕터 4

by But Tier

나는 물류본부 인력 효율화에 대한 최종 보고서를 원래 일정보다 한 달 빨리 제출했다.

이미 정해진 결론을 위한 치밀한 정당화 작업.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답’을 뒷받침할 수치와 논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보고서가 조금이라도 허술하거나 추후 문제가 발생하면 모든 책임은 나에게 돌아올 것이란 사실을.

그래서 100페이지가 넘는 보고서를 작성하며 단 하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보고서 제출일, 나는 인사팀 임원과 본부장 앞에서 진행할 PT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리 본부장은 PT를 듣기조차 귀찮은 듯 보고서를 펼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몇 명이나 줄일 수 있는 거야?”


그가 던진 한마디에 순간 정신이 망해졌다.

종이 위 숫자들은 의미를 잃었고 내가 쏟아 부은 시간과 노력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결국 보고서는 처음부터 단지 형식적인 절차, 요식 행위였을 뿐이었고 나는 단지 그 숫자 하나만을 위한 들러리였음을 직감했다.


며칠 뒤 인사팀에서 조직 개편 공지가 내려왔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의 핵심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인력 효율화를 1년에 걸쳐 4단계로 나누어 점진적으로 재배치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에 따라 1차로 5명의 직원이 다른 부서로 전환 배치됐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물류 경력이 10년이 넘는 직원을 법무팀으로 발령낸 것이었다.

물류 외에는 경험이 없던 그는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스스로 사표를 냈다.

이후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회사가 노조 설립에 관심이 있는 직원들 뒷조사하는 데 그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확인된 바는 없었다.


얼마 후, 승진 발표 시기가 다가왔다.

당연히 나는 본부장이 약속했던 운영팀장으로의 승진을 기대했다.

그러나 발표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본사 총무팀장이 갑자기 물류운영팀장으로 보직 변경되었고 나는 그의 팀원으로 배정되었다.

그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고 분노가 온몸을 타고 번졌다.

내가 작성한 보고서의 목적은 조직의 효율화가 아니라 누군가의 의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고 내가 참고 버텼던 시간은 단지 본부장에게 이용당한 시간이었다는 걸 깨달었다.


"미친놈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었고, 인생은 어이없이 흘러간다."


운영팀장 자리를 약속 받았던 나는 결국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하지만 본부장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미 그런 인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복용 중이던 항불안제 덕분에 무뎌진 감정이 그 현실을 덜 아프게 만든 걸까.

나는 그렇게 그냥 익숙해진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로 온 운영팀장은 총무 경력만 20년이었다.

그런 그가 물류 운영팀장으로 발령된 이유를 궁금해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실에 소문이 퍼졌다.

본사 총무팀장 시절, 그가 비위를 저질러 지방 지점으로 좌천 위기에 처했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마침 평소 친분이 있던 물류본부장에게 사정을 이야기했고 본부장은 인사팀과 모종의 거래 끝에 그를 물류 운영팀장으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인사팀 직원이 내 옆을 지나며 귀띔해줬다.

“1년만 버티세요. 곧 갈 사람이니.”


그래, 내가 지금까지 몇 년을 버텼는데 그깟 1년을 못 버틸까.

처음에는 그런 마음으로 팀장과 잘 지내보려 노력했다. 같은 가장으로서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 애썼다.

그러나 현실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물류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없는 사람이 팀장이 된 탓에 간단한 결제도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해줘야 했고 보고서는 번역해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보고 및 결제는 지연되기 일쑤였으며 심지어 아무리 좋은 제안이나 아이디어를 제출해도 팀장은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한 것에 사인할 용기도 없었다.


팀장은 애초부터 본인 업무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다시 본사로 돌아갈지였고 하루하루가 그런 고민뿐이었다. 그런데 성격 급한 본부장은 차선임자인 나를 닦달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팀장과 나 사이에도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그 후로는 나 역시 회사 생활에 더 이상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팀장은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게 서로 불편했던지 아님 나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였는지 나를 각 지점으로 돌며 업무 프로세스를 점검하라는 명목으로 사무실 밖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내게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다른 업무는 하지 말고 지금까지의 업무 프로세스를 논문 형식으로 정리해서 보고서를 제출해.”


본격적으로 업무 배제가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나와 친하게 지내던 직원들에게조차 팀장은 서로 업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점점 조직에서 투명인간이 되어갔다.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고 자존감은 무너져 바닥을 헤맸다.

동료들의 시선과 속삭임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느껴졌다.


아침마다 회사 문을 여는 게 두려웠고, 문 앞에선 늘 발걸음이 멈칫했다.

저녁이면 공허함만이 가득한 책상을 뒤로한 채, 텅 빈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병원에서 추가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러던 그해, 코로나가 발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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