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두고 떠난 스리랑카 여행기: 피두랑갈라에서 놓친 것과 얻은 것
새벽 네 시. 익숙한 알람소리 대신 생경한 자명종이 큰 소리로 울린다. 귀가 찢어질 것 같다. 눈을 비비며 숙소 호스트 누완의 차에 타 스리랑카 대표 관광지인 시기리야락으로 향했다. 폭우 때문에 코앞에서 포기했던 어제가 떠올랐다. 작은 알전구를 켜놓은 구멍가게에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기만 했던 어제. 이번엔 사진 속 고고한 시기리야락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운전을 하던 누완이 갑자기 속도를 줄였다.
“앞을 보세요. 코끼리에요.“
깜깜했지만 어렴풋이 형상이 보였다. 정말 코끼리였다.
“어머, 정말 코끼리네!”
“가끔 정글에 사는 코끼리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와요.”
숙소 주변에 있는 수십 마리의 길 원숭이들도 놀라웠는데 길 코끼리까지 볼 수 있는 마을이라니. 이게 바로 정글 마을이구나 싶었다.
길끼리를 피해 조심조심 운전한 누완의 차는 곧 피두랑갈라 전망대에 도착했다. 피두랑갈라 전망대는 시기리야락의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는 여기서 일출을 보기로 했다. 전망대까지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말이 전망대지 그냥 산길이었다. 사방이 깜깜해서 손전등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손전등을 따로 챙기지 않은 게 후회됐다. 여행하는 내내 손전등이 아쉬운 순간이 많았다. 평소 스마트폰의 손전등 기능을 자주 쓰면서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친구 휴대폰에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길 중턱에서 어미 개와 새끼 강아지들을 만났다. 우리를 보더니 두려운 기색 없이 다가왔다. 무방비 상태로 꼬리를 흔들며 새끼들을 데리고 오는 어미 개를 보니 그동안 이 길을 지나쳤을 사람들의 다정한 손길이 그려졌다.
어미 개의 바짝 마른 몸이 신경 쓰여 가방을 뒤졌다. 딱히 줄 게 없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 강아지들을 위한 담요와 물그릇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 그릇 안에는 깨끗한 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작고 연약한 길 동물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었다.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갈수록 험해졌다. 급기야 나중에는 두 손 두 발을 써 바위를 타야 했다. 고생, 아니 개고생 끝에 전망대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해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자리를 잡고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사방은 온통 안개뿐이었다. 장엄한 일출은커녕 시기리야락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원숭이 몇 마리가 하릴없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허망했다. 어제는 폭우에 고생하고, 오늘은 비싼 택시비까지 들여 새벽부터 험한 산길에 올라 겨우 보고 있는 게 희뿌연 배경 속에서 휘적거리는 원숭이들이라니. 짜증이 났다.
그러나 멋진 일출을 놓치는 대신, 이 순간을 기점으로 마음속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그건 원하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힘을 풀고 받아들이는 마음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독 계획이 자주 어그러졌다. 여행하기 가장 좋다는 건기를 골라 왔는데 늘 비구름과 함께 다녔다. 스리랑카 현지인들도 기상 이변에 고개를 갸웃했다. 기대하며 갔다가 실망하며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내려놓음’을 배웠다. 삶에서 원하는 걸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어쩌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피두랑갈라 바위를 터덜터덜 내려오려 생각했다.
‘어쩌면 원하는 것을 놓치는 순간, 진짜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찾게 될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