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9] '매운 바가지맛' 도시, 캔디

스마트폰 두고 떠난 스리랑카 여행기: 로컬버스 타고 캔디로 넘어가기

by 삼콩

숙소로 돌아와 짐을 챙겨 다음 목적지인 캔디로 향했다. 숙소 주인 누완이 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줬다. 고마운 마음에 팁을 내미니 괜찮다고 사양하는 모습에서 다정함이 느껴졌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스리랑카 버스 터미널은 그 자체로 관광지다. 여러 도시로 향하는 버스가 정차해 있고 각각의 버스 앞에서는 누군가 열심히 싱할라어로 랩을 하고 있다. 이들의 랩을 자세히 들어보면 한 단어만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분들은 정류장에서 승객을 안내하고 요금을 받는 버스 안내원이다. 현지에서는 버스 컨덕터나 티켓 콜렉터라고 부른다. 티켓 콜렉터들은 승객을 모으기 위해 찹쌀떡처럼 쫄깃한 목적지 랩을 구사한다. 특히 출퇴근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 가면 버스 컨덕터들이 서로 다른 목적지를 외치며 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벌이는 놀라운 구경을 할 수 있다. 현란한 랩 사이에서 다음 목적지인 ‘캔디’를 외치는 래퍼를 찾아냈다. 토익 듣기 문제의 정답이 한 귀에 쏙 들어올 때처럼 반갑다.


로컬버스는 새까만 매연을 뿜으며 70km 거리를 세 시간 동안 달렸다. 뒷문은 항상 열려 있다. 창밖으로는 스리랑카인들의 일상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나는 첫 산책을 나온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의 삶을 훔쳐봤다. 자전거, 오토바이, 툭툭, 버스, 자동차가 함께 달리는 일 차선 도로.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의 새하얀 교복, 중고 자동차 부품을 잔뜩 모아둔 공장, 무슬림 마을의 주민들이 쓰고 있던 이슬림식 모자 타키야. 한참 창밖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승객들이 많아졌다. 좌석도, 통로 공간도 비좁아 모르는 사람들의 엉덩이가 코앞에 놓여있다. 쿨한 스리랑카인들에게 이 정도는 노 프라블럼인 듯하다. 웃음이 나왔다. 스마트폰이 없어도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 울릴지 모르는 알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창밖으로 엿보는 스리랑카인들의 일상



세 시간을 달린 버스는 목적지 캔디에 도착했다. 이름에는 힘이 있다. 스리랑카 중심부에 위치한 캔디(Kandy)의 싱할라어 유래는 ‘산에 위치한 도시’라는 뜻이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영어 단어 캔디(Candy)와 소리가 같다. 스치는 바람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올 것만 같은 이름이다. 이름마저 달콤한 이 도시에선 어떤 낭만적인 일들이 일어날까? 어떤 맛인지 모르는 알사탕 포장지를 벗겨내는 기분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캔디에서 처음 맛본 건 바로 매운맛 바가지였다. 보통 여행자들은 차량 호출 서비스를 이용해 툭툭을 부른다. 이렇게 하면 스리랑카 현지인들과 같은 값을 낼 수 있다. 스마트폰이 없는 나는 미리 비용을 검색해 놓았다. 내가 찾아본 시장 가격은 300루피였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의 툭툭 기사들은 500루피를 불렀다. 훨씬 더 높은 가격을 부른 기사도 있었다. 바가지를 씌우는 그들이 괘씸하지만 당장 배낭을 멘 어깨가 무겁고 허리는 뻐근했다. 어쩔 수 없이 400루피에 협상해 툭툭에 올랐다. 큰돈은 아니었다. 100루피, 한화로 500원 정도를 더 낸 셈이다. 고작 500원 차이인데도 기분이 언짢았다.


툭툭은 금세 숙소에 도착했다. 여행자들이 머무는 저렴한 숙소들은 대부분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경사가 가파른 편이라 오갈 때 번거롭긴 하지만, 도심에 비해 조용하고 평화로울 뿐 아니라 전망이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다. 처음 방에 들어섰을 때, 발코니 밖으로 펼쳐지는 사랑스러운 도시의 전경에 탄성이 나왔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건 도심 중심부에 있는 캔디 호수이다. 짙은 옥색을 띤 고요한 호수 표면은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 호수는 1807년 캔디 왕국의 왕 스리 워크라마 라자싱하가 만든 인공호이다. 인공 호수이지만 완벽하게 대칭적인 모양이 아니라 지형을 따라 곡선을 그리며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호수 끝자락에는 하얀 울타리가 쭉 이어지는데, 마치 우아한 레이스 끝단 같다. 호수 주변에는 알록달록한 지붕들과 이름 모를 야자수가 조화롭게 섞여 이곳이 낯선 이국의 땅임을 외치고 있다. 중심부 바깥에는 완만한 언덕들이 도시를 포근히 감싸 아늑한 느낌을 더해 준다. 날이 흐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다. 풍경에 차분함 필터를 얹은 듯하다.

오후의 캔디 호수

이 장면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다. 문득 하룻밤 더 묶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운터에 물어보니 안타깝게도 내일 예약이 다 찼다고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언덕길을 따라 걷다가 한 식당을 발견했다. 숙소와 마찬가지로 호수의 풍경을 내려보며 식사할 수 있는 근사한 레스토랑이었다. 2000루피, 한화로 만 원 정도 되는 볶음밥을 시켰다. 스리랑카 물가를 고려하면 비싼 가격이지만 풍경이 마음에 들어 불만이 없다. 음식을 기다리며 한 시간 전 툭툭 기사와 500원을 놓고 이마의 실핏줄을 세우며 흥정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왜 2000루피짜리 볶음밥은 아무렇지 않게 시키면서 아까 100루피 바가지는 그렇게 억울했을까? 전자는 볶음밥을 시키는 모두에게 똑같이 청구되는 돈이고, 후자는 어리숙한 외국인 여행자에게만 붙는 추가금이어서 그런 것 같다. 내가 정말 억울했던 건 돈 100루피가 아니라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한다는 느낌이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싱할라어를 못하기 때문에,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겪는 차별이 문제였다.


씁쓸한 마음으로 볶음밥을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입 안으로 짠맛이 강하게 퍼졌다. 스리랑카 음식은 정말 짜다.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며 짭짤한 볶음밥을 깨끗이 비웠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옥색 잔물결 위로 어스름이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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