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두고 떠난 스리랑카 여행기: 담불라 시기리야락
피두랑갈라 바위에서 일출 보기는 실패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시기리야락이 남아 있었다. 날이 흐렸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아 시기리야에 도전하기로 했다. 시기리야는 정글 한가운데 우뚝 솟은 200m 화강암 바위에 만들어진 요새다. 정말 뜬금없는 곳에 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더 뜬금없게 그 바위에 왕궁이 세워져 있다. 누가 여기에 왕궁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바로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모리안 왕국의 카사파 왕이다. 카사파 왕의 아버지 다투세나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첫째 아들 카사파의 어머니는 평민이었고, 동생 목갈리나의 어머니는 왕족이었다. 카사파는 형이었지만, 왕위 계승의 정당성은 왕족의 피를 물려받은 동생에게 있었다. 왕이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 카사파는 아버지를 감옥에 가두고 살해한다. 결국 카사파는 왕좌에 올랐으나 늘 두려움에 시달린다. 인도로 도망간 동생이 언제 복수하러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불안증에 고통받던 카파사는 이를 대비하기 위해 높은 바위에 거대한 요새를 건설하는데, 이게 바로 시기리야다.
그런데 예술은 광기의 한 형태라고 했던가, 카파사 왕에게는 편집증적인 불안 장애뿐 아니라 건축과 예술에 대한 천재적인 감각이 있었다. 그는 시기리야를 단순한 피난처가 아닌 예술과 건축 양식이 어우러진 최고의 궁전으로 만들었다. 실용성도 놓치지 않았다. 바위산 정상에는 빗물을 저장해 사용할 수 있는 정교한 수로 시스템을 만들었다. 대칭적으로 설계돼 조형미를 느낄 수 있는 정원에는 비가 오면 자연스럽게 물이 솟아오르는 분수를 만들었다. 외곽 성벽을 따라 깊은 해자를 파서 방어시설뿐만 아니라 궁전과 정원을 위한 수자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성벽에는 벽화를 남겼는데, 스리랑카 고대 미술의 정수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작품들이었다.
이토록 완벽하고 아름다운 방어 요새를 만들었지만, 카사파 왕은 인도에서 이를 갈고 돌아온 동생 목갈라나와의 전투에서 패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의 비참한 최후였다. 그 후 시기리야는 수도원으로 사용되다 역사에서 잊힌다. 1982년, 고고학자들이 시기리야를 재발견한다. 시기리야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오늘날 스리랑카의 가장 유명한 유적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안개에 둘러싸인 시기리야 왕궁을 산책했다. 희미하게 드러났다 사라지는 성벽의 윤곽이 마치 불안에 휩싸인 카사파 왕의 마음처럼 느껴졌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불안의 힘’에 대해 생각해 봤다. 불안은 우리의 내적 세계를 흔들고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하지만 때로는 위대한 창조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불안은 우리의 생존 본능을 자극하고, 우리가 행동하게 만들며,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있는 창의성에 불을 지피기도 한다. 이 왕국의 모든 성벽, 정원, 수로는 카사파 왕의 불안 속에서 탄생한 거대한 예술작품이었다.
1200개가 되는 계단을 천천히 내려오며 나의 불안을 들여다봤다. 나도 평소에 불안도가 높은 편이어서 그런지 카파사 왕의 이야기에 마음이 갔다. 불안은 큰 파도와 같다. 잘 다스린다면 파도를 타고 멀리멀리 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파도에 잡아먹히게 된다. 나도 나의 불안을 자양분으로 삼아 나만의 시기리야를 건설하고 싶다. 그러나 욕심에 사로잡힌 카파사 왕처럼 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바위산 아래 정원으로 내려왔다. 뒤돌아 본 시기리야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안개가 걷히고 밝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이틀 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