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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개나리 2

해방의 그늘에서 피어난 배신의 꽃

by 강순흠 Mar 29. 2025




 *해방의 역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은 순형의 귀를 후벼 파는 칼날이 되었다. 거리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환호성이 울려 퍼졌지만,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게 해방이냐, 재판이냐, "

그는 속삭였다. 해방은 그에게 기쁨이 아닌 공포로 다가왔다.

일본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의 삶이 무너진다는 뜻이었다.

그동안 친일 경찰로 일하며 쌓아온 지위, 재산,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제국이…."
순형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위엄을 떠올렸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원자폭탄이라는 무리수를 낳았고,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거리에서 울부짖는 성난 민중들을 바라보며 "저들이 나를 용서할 리 없다"라고 중얼거렸다.  

 오후 3시.
거릿바람에 실려온 함성은 순형의 심장을 할퀴었다. 태극기가 창밖마다 펄럭이는 모습이 마치 피 묻은 손수건이 흩날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경찰복 단추를 꽉 쥐었다. 금빛 꽃잎 문양이 새겨진 단추, 일제의 상징이자 그의 생계를 지켜준 단추가 이제는 독이 되려 했다.  

"이놈의 옷…."
손가락이 저려왔다. 작년 봄, 독립운동가 김상진을 체포했을 때도 같은 단추를 만지작거리던 기억이 스쳤다. 그날 그는 일본 상사의 칭찬을 받으며 고등계 형사실에서 소주를 마셨다. 김상진의 비명은 병원 천장에 달린 전구 소리처럼 희미해졌다. 지금 그 전구가 터지듯,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내면의 회상: 피로 물든 단추


"대일본제국 만세!"


1942년, 광주역 광장. 순형은 만세 삼창 구호에 목청을 돋우며 주먹을 쳐들었다. 뒤엔 학생들이 철사줄에 묶여 있었다. 한 소녀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일본도 칼등으로 그녀의 어깨를 내리쳤다.


"죽어도 황국신민으로 죽어라!"


그녀의 피맛이 공기 중에 퍼지는 걸 느꼈다. 지금 그 피가 태극기의 흰 바탕을 타고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다.  


악몽같은 거리에 성난 군중의 함성이 돌덩이가 되어 굴러왔다.

"친일파 놈의 자식!" 잡아라!!


누군가의 침이 그의 광대뼈에 닿았다. 1940년 체포한 밀고장 작성자의 목소리, 1943년 밀정질로 빼앗은 전답 주인의 고함, 모든 원한이 혼성된 함성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일본제 남부 권총이 없었다. 해방 3일 전, 상부에서 모든 무기를 회수해 갔다.

 "너흰 이미 버림받았다."

일본인 경찰감이 웃던 눈초리가 선했다.  

"영원할 줄 알았지?"


그는 황금당에서 뇌물로 받은 금시계를 꺼냈다. 초침 소리가 폭탄 타이머처럼 울렸다. 12시 방향에 새겨진 메이지 천황의 초상이 일그러지며 웃었다.  


*신체적 붕괴
다리가 풀렸다. 계단에 주저앉은 순형은 손바닥의 땀을 닦으려 했지만, 오히려 일본제 군화에 묻은 진흙이 번졌다. 1937년 중일전쟁 참전 기념으로 받은 이 부츠가 발을 옥죄었다.


'내가 진짜 일본인이었더라면….'


 허망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갑자기 목덜미가 얼어붙었다. 그곳을 어루만지던 일본인 아내의 손길이, 이제는 교수형 밧줄로 느껴졌다.  

"순형 씨, 이리 오시오!"  
골목 끝에서 흰 두루마기를 입은 친구가 손짓했다. 박 의사 3년 전 결핵 환자를 '불령선인'으로 몰아 세균실험에 넘겼던 그가 지금은 구원의 천사처럼 보였다. 순형은 일어섰다. 발밑에 깔린 태극기 조각을 밟으며 생각했다.  

"해방이 재판이라면… 내 심장이 법정이겠지."

그는 박 의사의 손을 잡는 대신 반대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저녁노을이 그의 그림자를 찢어버렸다. 조선총독부 방향으로 뻗은 검은 실루엣은 점점 짧아지다가, 어둠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두석은 순형의 오랜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였다. 해방 전부터 비밀리에 건국위원회와 연결되어 지방 자치조직을 확대해 온 인물. 건국위원회를 이끌며 혼란한 행정 체계를 정비하는 그의 모습은 순형에게는 위협이었다. "그가 살아남으면 내가 죽는다, "

순형은 손가락을 꼬집으며 다짐했다.  

어느 날, 순형은 두석의 집에 남아 있던 알렉산드르 블로크의 러시아 시집을 발견했다. 표지가 닳아 해진 책에는 '붉은 별'이란 낙서가 되어 있었다. "이거면 충분해, "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시집을 증거로 삼아 두석을 "빨갱이"로 모함하기로 한 것이다.  

"친구야, 네가 선택한 길이 너를 죽일 거다."
순형은 거짓 신고서를 작성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난 살아야 해. 이건 생존이지, 배신이 아니야."


*과거의 그림자 1928년 동경

"일본 시가 아니라 러시아 시를 읽는다고?"
순형이 두석의 책상을 툭 쳤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도서관 창가에 놓인 알렉산드르 블로크 시집이 햇빛에 반짝였다. 두석은 웃으며 책을 덮었다.

"이 시인은 혁명의 불꽃을 노래해. 조선에도 이런 불이 필요하지 않겠나?"
순형은 친구의 어깨를 탁 치며 소주병을 내밀었다.

"시치미 떼라  우리는 법학도야, 혁명가 말고."

그날 밤, 둘은 교토의 료칸에서 취한 채로

"우린 영원한 형제"

라 맹세했다.  


 *현재의 배신  1945년 9월 
순형은 두석의 집 담장을 넘으며 허리춤의 시집을 눌렀다. 표지가 벗겨진 책장 사이로 낡은 편지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1943년 2월, 두석이 경성에서 보낸 것.

"일제가 무너질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 진심을 드러낼 때다. "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칼처럼 가슴을 찔렀다.


 '진심? 내 진심은 살아남는 거야.'  

그는 경찰서장실에 진을 치고 새벽까지 거짓 증거를 조립했다. 블로크 시집의 여백에 붉은 잉크로 "노동자여, 일어나라!"라는 문구를 흉내 낸 필적. 가짜 서명을 연습하던 순형의 손가락이 떨렸다. 문득 창밖에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두석이 건국위원회를 이끌고 거리를 순회 중이라는 정보였다.  


*조작의 현장
"이게 마지막이다."  
순형은 두석의 집 문짝을 부수며 돌진했다. 책상 위에 펼쳐진 건국강령 초안을 찢어내는 동시에, 블로크 시집을 탁탁 떨리는 손으로 협탁 위에 놓았다. 그 순간, 뒤에서 차가운 숨소리가 들렸다.  

"그 시집… 내가 유학 시절 너에게 선물한 거였지?"  
두석이 문간에 서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순형이 1937년 중일전쟁 참전 기념으로 받은 단도가 쥐여 있었다. 순형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놈, 내 모든 걸 알고 있구나.'*  


"네놈이… 내 집에 왜?"  
두석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순형은 허리춤의 조작된 문서를 내려다보며 말을 뱉었다.  

"빨갱이로 몰려 죽을 거면, 내 손에 죽는 게 나을 걸."  

단검이 공중을 가르는 소리. 순형은 본능적으로 시집을 들어 막았다. 책장 사이로 흘러나온 낡은 사진 한 장이 바닥에 떨어졌다. 1928년, 동경에서 찍은 두 사람의 흑백사진이었다. 등 뒤로 대학 건물의 현판이 선명했다.  

"저 땐… 진짜 피를 나눈 형제 같았는데."  


두석의 목소리가 갑자기 무너졌다. 순형은 그 틈을 타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발목을 접질린 채 도망치는 동안, 귓가에 두석의 외침이 맴돌았다.  

"다음번에 만날 땐, 한 놈만 살아남을 거다!"  

순형은 경찰서 지하 감옥에서 허둥대며 서류를 올렸다. "두석의 집에서 적화문서를 압수했습니다." 일본식 직책을 버리지 못한 그가 아직도 '계장(係長)'이란 직함을 외치는 걸 보며, 뒤틀린 운명에 젊은 직원들이 수군댔다.  

"저 놈의 피가 시집에 묻었습니다."  
순형이 증거봉투를 내던지자, 블로크 시집에서 핏자국이 번져 나왔다. 그게 누구의 피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감옥 밖에서 건국위원회의 구호가 밤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순형의 내면은 균열이 갔다. 한편으로는 두석과의 우정이 마음을 할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생존 본능이 그를 옥죄었다. 해방 직후의 문학적 경향처럼, 그의 갈등은 자기 합리화와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팽팽하게 흔들렸다.  

▪︎자기 합리화의 논리
  "일제는 조선을 발전시켰다. 내가 한 일은 조선을 지키기 위함이었어."  
  그는 일제 말기 전시체제하에서의 협력을 필연으로 포장했다.  

▪︎양심의 고백
  밤마다 두석과의 추억이 악몽으로 돌아왔다. 어린 시절 함께 읽던 책, 동경유학을 하며 도쿄의 거리에서 독립을 꿈꾸며 나눈 술자리… 현실 앞에서 일제의 경찰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 그런 나를 어깨를 툭 치며 빙그레 웃어주던 두석의 미소...

"내가 왜 이러지?"

그는 창문을 열어젖히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정치적 혼란과 인간의 말로
해방 공간은 혼돈 그 자체였다. 정부 기관이 마비되자 지방의 자치조직이 권력을 잡기 시작했고, 좌우 이념의 갈등은 폭력으로 치달았다. 두석이 이끄는 건국위원회는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민심을 얻어갔지만, 순형의 모함으로  정적의 표적이 되었다.  

"두석 씨, 당신을 체포합니다."
경찰이 들이닥치고 붙잡혀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두석은 순형을 향해 침묵했다. 그의 눈에는 실망보다 연민이 비쳤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됐나?"  

"해방이란 빛은 누구에게는 고통의 그림자를 드리우는구나."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마지막 독백을 남겼다.  


# 작가의 말
해방기의 이념적 갈등개인의 생존 본능을 교차시켜, 친일 청산의 역사적 과제를 인간적 층위에서 조명했습니다. 순형의 배신은 단순한 악의가 아닌 시스템이 강제한 비극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두석의 결백함은 진보적 이념의 순수성을 상징합니다. 해방기 문학이 추구한 '침묵의 전략'과 '겸손 언행의 전략'을 차용해 인물의 내면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문학은 패배자의 숨결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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