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설아빠의 Global Business Story
2008년 9월 15일(현지), 158년 역사의 리먼브라더스가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 바로 다음 날, 안전자산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머니마켓펀드(MMF) ‘리저브 프라이머리 펀드’가 1달러 기준가 아래로 떨어지는 ‘버크 붕괴’를 선언하며 단기자금시장은 얼어붙었다.
뉴스 헤드라인은 “달러 시대는 끝나는가”로 뒤덮였지만,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공포가 커질수록 전 세계는 더 많은 달러를 찾기 시작했다. 위기의 진원지가 미국이었는데도 달러 수요가 폭증한 현상, 이 지점이 바로 ‘달러의 역설’이다.
2000년대 중반 저금리와 ‘집값은 오른다’는 믿음이 결합하며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급팽창했다. 동네에서 실행된 대출은 묶여 MBS(주택담보부증권)로, 다시 여러 바구니를 섞은 CDO(부채담보부증권)로 재포장되어 글로벌 금융기관과 연기금, 보험사의 포트폴리오에 깊숙이 들어갔다. 금리 리셋과 주택가격 하락이 시작되자 연체가 늘었고, 높은 레버리지로 쌓아 올린 종이탑의 기초가 흔들렸다.
2008년 3월 베어스턴스의 사실상 구제합병 이후에도 시장 불신은 가라앉지 않았고, 9월 15일 리먼의 파산은 “대형 증권사라도 반드시 구해주진 않는다”는 신호로 읽혔다. 은행 간 신뢰가 증발하며 단기조달이 멈췄고, 이틀 뒤 MMF의 버크 붕괴는 ‘현금 유사자산’의 안전신화를 무너뜨렸다. 그 순간 3개월 리보(LIBOR)와 3개월 미 국채금리(T-bill)의 격차인 TED 스프레드는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며 은행들의 달러 조달이 사실상 막혔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러한 충격이야말로 달러 수요를 증폭시켰다. 글로벌 금융의 언어가 달러였기 때문이다. 우선, 전 세계 은행·기업이 달러표 부채를 지고 있었고, 만기 상환과 마진콜은 달러 현금을 요구했다. 국제 원유·원자재 결제, 파생상품의 담보와 정산 역시 달러가 표준이었다. 대체재의 한계도 분명했다. 당시 유로는 은행·재정 리스크가 겹쳤고, 엔화는 시장 깊이와 금리 구조에서 제약이 있었으며, 위안화는 자본통제가 강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흔들리면 달러가 약해진다”가 아니라, “미국이 흔들릴수록 결제·상환·담보를 위한 달러 수요가 폭증한다”는 구조가 드러났다. 국제결제은행(BIS)이 말한 ‘글로벌 달러 부족(USD shortage)’이 바로 이 현상의 압축된 이름이다.
숨통을 틔운 것은 연준(Fed)의 달러 스왑 라인이었다. 연준이 유럽중앙은행, 영란은행, 스위스국립은행, 일본은행 등과의 스왑 라인을 대폭 확대(일부는 사실상 무제한)하고, 상대 중앙은행이 자국 금융기관에 달러를 재대출하는 ‘국제 소방호스’가 작동했다. 9월 말 FOMC는 한도를 추가로 3,300억 달러 늘렸고, 10월에는 만기를 연장하며 공급 스케줄까지 공개해 단기 달러시장에 예측 가능성을 부여했다. 이어 11월 25일에는 MBS·GSE 채권의 대규모 매입을 발표해(QE1의 사실상 출발) 주택금융의 핵심 담보를 중앙은행이 직접 받아냈다.
2009년 3월까지 매입 규모가 1조 달러를 넘기며, 시스템의 심장부인 주택·은행·단기자금으로 유동성이 빠르게 주입되었다. 이후 유럽재정위기와 2020년 팬데믹에서도 ‘달러로 피신’하는 본능과 스왑 라인의 재가동은 반복되었고, 상시 라인과 필요시 임시 라인으로 스왑 네트워크가 제도화되면서 연준의 “마지막 달러 대부자” 지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2008년의 불길은 달러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동시에, 글로벌 금융 인프라에서 “깊고 넓으며 빠르게” 공급될 수 있는 유동성이 달러뿐이라는 사실도 확인시켰다. 위기 시 달러표 부채 상환과 마진콜이 몰리자 단기 달러는 말랐고, 자금은 미 국채 같은 최상급 담보로 쏠렸다. 그 공백을 메운 것은 연준의 스왑 라인과 대규모 자산매입(QE)이었다.
교훈은 분명하다. 달러는 위기 때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을 흡수하고 질서를 복구하는 최종 안전망 또한 달러다. 그래서 위기 이후 달러의 네트워크 효과는 오히려 커졌다. 오늘의 기업과 정책 당국이 가져가야 할 실천 포인트도 여기서 나온다. 단기 달러 유동성 확보(현금·신용라인·담보 관리), 스트레스 지표(TED 스프레드 등)의 상시 모니터링, 글로벌 결제·담보 체계가 달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현실 인식이다.
달러의 시대가 영원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대체재가 충분히 크고 깊어지지 않는 한, 위기가 클수록 달러의 수요와 역할이 커지는 역설은 당분간 유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