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로 가보자! 프랑스 파리 전시회 참가(2)
첫째 날 오후, 전시장 입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도현은 여전히 낯선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개막식의 열기, 화려한 부스들, 세련된 언어와 제스처 등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익숙하지 않은 건, 사람들이 뷰티스타 코스메틱 부스를 ‘그냥 지나친다'는 사실이었다.
“이 정도면… 우리만 공기 취급받는 느낌이네요.”
효진이 카탈로그 더미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도현은 고개만 끄덕일 뿐,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부스 앞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눈으로 좇았다. 다양한 국적과 언어, 그리고 대부분이 뭔가를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뷰티스타는 아무도 모르는 그저 한국에서 온 작은 브랜드였다. 그리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 누구도 부스에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때 기석이 조용히 도현에게 다가왔다.
"대표님,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브랜드를 현지 바이어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보통 같은 전시회, 같은 부스 위치를 3 ~ 5년 정도 꾸준히 참가해야 합니다. 그러면 바이어들이 나의 브랜드를 기억하고,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기석의 말은 위로가 아닌, 조언이었다.
“그리고 대표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입니다. 먼저 다가가는 겁니다.”
“어떻게요?”
기석은 고개를 돌려 효진을 불렀다.
“효진 씨, 카탈로그랑 샘플,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네? 아, 네. 가능해요.”
“바이어처럼 보이는 분들에게 다가가 가볍게 샘플과 카탈로그를 전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우리 부스로 유도할 수 있습니다. 당장은 우리 부스에 관심이 없을 수는 있지만, 일단 샘플을 손에 들면 시선은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디로 가는지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가능하면 우리 부스 쪽으로 유도해 보는 겁니다.”
도현은 잠시 망설였다. ‘호객 행위처럼 보이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들었지만, 지금은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좋아요. 저도 나가볼게요. 효진 씨와 제가 번갈아가며 바이어를 유치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두 명은 부스를 지키고, 한 명은 바깥에서 움직이죠.”
효진은 어깨에 카탈로그가 든 가방을 메고, 한 손에 미니 샘플 포장을 들고 나섰다. 그녀는 유창하진 않지만 부드러운 미소와 간결한 영어로 전시회 방문객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Hello, this is a Korean skincare brand. Would you like to try a free sample?”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스킨케어 브랜드입니다. 무료 샘플 한번 사용해 보시겠어요?)
효진은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하며 리듬을 조절했다. 무시당해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러자 서서히, 그리고 조금씩 뷰티스타 부스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효진은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멘 채, 조금 숨을 몰아쉬며 부스로 돌아왔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손에는 절반쯤 비워진 샘플 봉투가 들려 있었다.
“대표님.”
그녀가 도현을 향해 작게 웃으며 말했다.
“몇 명은 분명 우리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어요. 완전한 무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도현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한마디가,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격려보다 힘이 되었다. 그리고 오후 2시 40분쯤, 부스 앞에 한 여성이 멈춰 섰다. 단정한 검정 정장에 얇은 실버 브로치, 짙은 립스틱. 유럽에서 활동하는 듯 보이는 그녀는 일본계 바이어, 미나 하라다라고 했다.
“Excuse me. Are you the representative of this brand?”
(실례합니다. 이 브랜드의 대표자이신가요?)
도현은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Yes. I’m Dohyun, Kim, CEO of BeautyStar. Thank you for stopping by.”
(네, 저는 뷰티스타의 대표 김도현입니다. 저희 부스에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BeautyStar… interesting name. But tell me, what makes your products any different from more than the fifty other brands I've seen this morning?”
(뷰티스타… 흥미로운 이름이네요. 그런데 말이죠, 오늘 아침에만도 비슷한 브랜드를 쉰 개는 넘게 본 것 같은데, 귀사의 제품이 뭐가 어떻게 다르죠?)
질문은 직설적이었고, 시선은 차가웠다.
'뭐지, 이 사람은?'
도현은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채 짧게 숨을 삼켰다. 가슴속에 울리는 심장 박동이 거세졌지만, 그는 그 감정을 억누르며 말을 꺼냈다. 손끝엔 땀이 맺혔다. 그러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We focus on sensitive skin recovery using fermented herbal complexes from Korean traditional medicine. And this serum is our patented product tested on eczema-prone users.”
(저희는 한국 전통 한방 성분에서 유래한 발효 허브 복합체를 활용해 민감성 피부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럼은 아토피 피부 성향의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테스트한 저희의 특허 제품입니다.)
하라다는 샘플 용기를 집어 들고, 성분표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Your packaging is great. But in Europe, consumers care about certification. Do you have vegan, cruelty-free, or CPNP registration?”
(포장은 훌륭하네요. 하지만 유럽에서는 소비자들이 인증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비건, 동물실험 금지, CPNP 등록 같은 것 말이죠.)
“CPNP is already registered. We’re in process for vegan and animal testing certifications.”
(CPNP는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비건과 동물실험 관련 인증은 현재 진행 중입니다.)
“Process? That means not yet?”
(진행 중이라면, 아직 없다는 말이군요.)
“Correct. But our formulas are fully aligned with those standards, and we’re open to customizing for distributors.”
(맞습니다. 하지만 저희 포뮬러는 해당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며, 유통사를 위한 커스터마이징도 열려 있습니다.)
미나 하라다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도현을 바라보았다.
“Hmm… at least you didn’t overpromise. I like that.”
(흠… 적어도 과장된 약속은 하지 않으시네요. 그 점은 마음에 듭니다.)
그녀는 명함 한 장을 꺼내 도현에게 건넸다.
“I’m not saying I’m interested. But I’ll remember this interaction. Sometimes, honesty travels farther than a flashy pitch.”
(제가 관심 있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 이 대화는 기억해 두겠습니다. 때로는 화려한 설명보다 솔직함이 더 멀리 가니까요.)
그녀는 손을 가볍게 들어 인사를 하고 부스를 떠났다. 도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미나 하라다… 쉽지 않은 상대지만, 의미 있는 첫 접촉이었습니다.”
기석이 말했다.
“그녀가 다시 올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하지만... 저런 스타일이 나중엔 진짜 계약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바이어와 계약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 소중히 관리해야 합니다. 바이어들끼리 서로 제품을 소개해주는 경우도 종종 있어, 전혀 모르던 바이어와 연결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오후 4시경, 도현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티유 드랑이었다.
"Bonjour Mr. Kim. We’re on our way to your booth with my manager. See you in 4:10."
(봉주르, 김 대표님. 매니저와 함께 귀사 부스로 향하고 있습니다. 4시 10분에 뵙겠습니다.)
도현은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진짜 기회가 다가온다. 이번에 유럽 전시회를 참가한 가장 큰 이유였다. 정확히 10분 후, 마티유 드랑과 그의 보스, 장 베르나르(Jean Bernard)가 뷰티스타 부스에 도착했다. 장은 50대 초반의 중후한 인상에 간결한 말투를 가진 인물이었다.
“Mr. Kim, I’ve heard quite a bit about you. Let’s see what you’ve got.”
(김 대표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한번 어떤 제품인지 보여주시죠.)
도현은 준비해 둔 제품 설명과 테스트를 위한 샘플 키트를 꺼내 보이며 차분하게 소개했다. 효진은 프랑스어가 섞인 통역용 자료를 옆에서 지원했고, 기석은 조용히 제품 시연을 도왔다. 장 베르나르는 제품 샘플을 손등에 덜어 발라보며 말했다.
“Texture is clean. Absorption is fast. No fragrance… good. But how stable is this in transport? What about shelf-life?”
(텍스처는 깔끔하네요. 흡수도 빠르고, 향도 없고… 좋습니다. 그런데 운송 중 안정성은 어떤가요? 유통기한은 얼마나 되나요?)
도현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Up to 24 months, tested under multiple humidity and temperature ranges. We’ve conducted accelerated testing with SGS.”
(최대 24개월까지 유지되며, 다양한 온도와 습도 환경에서 테스트를 완료했습니다. SGS를 통해 가속 테스트도 진행했습니다.)
마티유 드랑이 장 베르나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 베르나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We don’t make a decision on the first day. But we’re willing to start with a sample-based evaluation in France. If the response is good, we’ll discuss distribution.”
(저희는 첫날에 결정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내에서 샘플 기반 평가부터 시작할 의향은 있습니다. 반응이 좋다면, 본격적인 유통에 대해 논의해 보죠.)
“Thank you. That alone means a lot to us.”
(감사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저희에겐 큰 의미입니다.)
마티유 드랑이 덧붙였다.
“Let’s have dinner tomorrow evening. Nothing formal. Just to talk.”
(내일 저녁 식사 같이 하시죠. 격식 차릴 필요 없이, 그냥 이야기 나누는 자리로요.)
도현은 바로 수락했다.
“It would be our pleasure.”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을 도현은 끝까지 지켜봤다. 바로 그때, 마티유 드랑이 천천히 돌아서더니, 도현을 향해 오른손 엄지를 들어 올렸다. 미소를 머금은 채, ‘좋았어’라는 의미를 담은 그 제스처는 말보다 더 강력한 신호처럼 다가왔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도현은 무거운 긴장이 풀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석과 효진이 다가왔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첫 번째 실질적인 오퍼입니다.”
기석과 효진이 축하의 말을 전하자, 도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휴... 네. 물론 계약은 아니지만… 테스트 샘플부터 시작하는 게 정석이죠.”
그는 부스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기회는 우리 쪽에 생겼어요. 그리고 이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맞아요.”
효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내일 저녁이면, 그 기회를 더 키울 수 있겠네요.”
도현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럽이라는 낯선 땅, 낯선 사람들, 낯선 시장. 하지만 지금, 단 한 걸음이지만 ‘현지와 연결된 실질적인 네트워크’가 생겼다. 그리고 그걸 만든 건 바로 기다린 게 아니라, 먼저 다가간 노력들 덕분이었다.
< 계속 >